오늘의 문장

태산에서 비 맞은 반기문(2015년 10월 16일)

divicom 2015. 10. 16. 11:21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여야 정치인들이 매일 싸우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편이 갈라져 싸웁니다. 

성인은 화합시키고 소인은 분열시킨다는데 이 정부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편 갈라 싸움 붙이기일 겁니다. 


'갈수록 재미 없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헤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셈을 멈추게 하는 

질문은 '그래서, 그 다음엔 누가 되는데?'입니다. 이명박 씨와 박근혜 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유권자들이 누구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겠느냐는 자조적인 질문이지요. 


그런 대화가 오가면 당연히 다음 대선 후보 물망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러다 보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거론되는 일이 흔합니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일 뿐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직함에 

대해 갖는 경외(?)는 지대해 보입니다.


마침 김수종 선배가 오늘 자유칼럼에 반기문 씨 얘기를 쓰셨기에 옮겨둡니다. '우중등태산(雨中登泰山')... 

어떤 한국인들의 사대주의를 반영하는 말이겠지요? 



www.freecolumn.co.kr

반기문의 우중등태산(雨中登泰山)

2015.10.16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9월 초 중국 태산(泰山)에 올라 비를 맞았다는 소식이 뒤늦게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중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반 총장은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론조사를 하면 선두를 차지하는 잠재적 대권 후보이니, 태산에 올라 비를 맞으면 운이 펴진다는 우중등태산(雨中登泰山) 속설이 증폭된 것입니다. 틈만 나면 고개를 내미는 ‘반기문 대망론’이 또 한 번 충전을 받은 형국입니다. 
당송(唐宋)시대도 아닌데 태산이 왜 이리 한국의 대권 구도와 연결되어 거론되는 것일까요.

7~8년 전 봄 중국 태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하늘은 푸르고 골짜기마다 복사꽃을 비롯하여 기화요초가 만발한 게 산에 오르기에 최적의 날씨였습니다. 일기가 좋다고 찬탄하였더니 관광가이드가 “이런 날씨에 태산을 찾았으니 선생님은 권세 운(運)이 없는 모양입니다.”라며 농담을 건넸습니다. 

관광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국회의원과 도지사 등 유력 정치인들이 태산 오르기를 좋아하는데 하나같이 일기예보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명한 날씨를 원하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을 택일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인으로 있던 1996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태산에 올라 비를 맞았고, 이듬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태산 관광가이드에게는 필수 소개거리였습니다. 이 얘기가 공공연히 퍼지면서 우중등태산(雨中登泰山)의 속설이 한국 정치권에 증폭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후 대권 후보로 거론되던 몇 사람의 유력 정치인들이 태산에 올랐지만 비도 안 내렸고, 대권후보가 되는 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계절에 따라 다르겠지만 태산은 건조한 산동성에 있어서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비를 못 만나면 운이 피지 못할 것이니 태산 방문은 위험한 도박 같기도 한데 한국 정치인들이 태산을 오르고 싶어 하는 심리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 태산이 갖는 역사적 위상 때문일 것입니다.

태산은 해발 고도 1,545미터로 우리나라 설악산에 비하면 높지도 않고 경치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태산이 중국인들에게 숭앙받는 것은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즉위한 후 태산 정상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봉선(封禪)의식을 치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태산은 황제의 산으로 성스러운 곳입니다. 진시황도 그랬고, 여자로서 최초로 천하의 대권을 쥔 당나라의 측천무후도 태산 꼭대기에 올라가 봉선의식을 치렀습니다. 

반기문 총장의 태산 등정 소식은 중국 지방신문과 SNS 등 현지 미디어들이 요란하게 보도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반 총장은 9월 3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다음 날인 4일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와 태산을 찾았습니다. 유엔 사무총장이 주 유엔 중국대사의 안내를 받으며 공자의 탄생지와 태산을 찾아갔으니 관료사회의 전통이 강한 중국인들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렸으니 우산을 쓴 반 총장 일행의 모습이 현지 언론에게 좋은 뉴스거리였을 것입니다. 

현지 신문에 보도된 반 총장의 등정 소감은 “예부터 태산에 오르고 싶었고, 태산을 올라가게 되면 그 어떤 곤란도 극복할 수 있다”였습니다. 이 한마디를 놓고 국내에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한국 사람이면 어릴 때부터 시조나 속담으로 들어왔던 태산이기에 한번 올라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반 총장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기회가 되어 태산에 올라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즘의 국내 정치판 정황을 놓고 볼 때 차기 대선과 관련하여 반기문 총장의 이름은 스스로 ‘대선후보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여권의 잠재적 후보로 끊임없이 등장할 기세입니다. 여론조사만 하면 선두에 오르는 그의 인기도, 청와대의 김무성 견제론, 충청권 대표주자론, 박근혜 대통령의 유엔 방문 때 자주 만난 점 등이 임기 말 조용히 퇴임을 준비하는 유엔 사무총장의 모습으로만 비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전혀 없는데도 2017년 대선 변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야권의 박원순 서울시장과 처한 상황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국내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정쟁을 벌이는 동안 반 총장은 유엔 최고위직에 7년간 있으면서 국제 문제를 두루 섭렵하는 경륜을 쌓는 이미지를 국민의 의식 속에 새겨 놓았습니다. 사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볼 때 대단한 자리가 못 되지만 한국인들은 유엔 사무총장의 이미지를 대단히 중요하게 인식합니다. 
유엔 사무총장, 특히 중소 국가 출신의 사무총장이 본국의 정치에 뛰어든 경우가 두 번 있었습니다. 제4대 총장 쿠르트 발드하임이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되었고, 5대 총장 하비에르 케야르는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후지모리에게 패퇴했습니다. 

대통령 잠재 후보로서의 여론조사 인기는 덧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2006년 전후 고건 전 총리의 여론조사 인기는 당장 뭐가 될 듯했지만 정치 세력화라는 동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썰물처럼 사라졌습니다. 반기문 총장이 고건 전 총리의 경우와 다른 게 있다면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내년 말까지 유엔 사무총장의 활동만으로도 국내 정치의 성층권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아니 최소한 선거에 임할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권력 의지와 국정개혁 구상을 갖고 정치 세력화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요건은 선거 전략의 문제입니다. 
선량한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선거 전략에 앞서 가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가치관을 말입니다.
정치 공학에서 요구되는 것이 여우의 간교함이라면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자의 용맹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