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 한국을 방문하려고 하는 미국 친구에게서 ‘메르스’ 사태에 대한 질문이 담긴 이메일이 왔습니다.
질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한국 정부와 보건당국이 세계보건기구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진압해가는 것 같은가?
2. 서울의 보통 시민들은 어떤 예방조치를 하고 있는가?
3. 메르스가 네 생활방식에 변화를 초래했는가?
4. 우리처럼 서울을 방문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
질문 순서에 따라 답변을 써 보냈습니다.
1. 진압? 그렇지 않은 것 같음.
2. 예방조치? 전보다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하지만, 대다수는 마스크도 하지 않음.
3. 내 생활방식? 아니, 변하지 않았음. 너도 알지만 난 꼭 필요할 때 빼고는 외출하지 않음.
4. 조언? 과로하지 말기 바람. 몸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걸리기 쉽다고 함.
손 자주 씻고 좋은 마스크 하길 바람. 중국, 대만 등지에서 오는 관광객 수는 많이 줄었다고 함.
친구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메르스’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부끄럽습니다. 환자 발견 초기에 정부와,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삼성서울병원 당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감염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도 부끄럽고, 중앙정부의 무능력을 보다 못해 메르스와의 총력 투쟁을 선포한 서울시장을 수사하는 검찰도 부끄럽고, 자기 당 출신이
아니라고 서울시장의 노력을 ‘똥볼’에 비유한 여당 국회의원도 부끄럽지만, 제일 부끄러운 건 메르스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직원들이 차별 당했다는 사실과 공공병원의 부족입니다.
서울시는 삼성병원의 비정규직 응급이송요원이었던 137번 환자가 병원 측의 관리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그 병원의 비정규직 직원 2,944명에 대해 전수조사를 했는데, 그 중 73명이 발열 등 메르스 의심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해당 직원들에 관한 정보를 서울의료원에 통보하고 검사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보건의료노조 유지현 위원장은 오늘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윤재선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메르스 사태 초기부터 비정규직의 안전 관리를 촉구했다고 말했습니다. 비정규직들은 환자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질환이 있는지, 어디가 위험한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용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의심 증세가 나타나도
신고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는 병원에 비정규직이 많아지는 것은 비용 절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의료서비스가 ‘돈벌이 산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발행하는 주간지 ‘청년의사’ 인터넷판에는 어제 응급의료체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이번에 삼성서울병원에서 일어난 일이 국내 유명 병원 어디서나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3월에 발표한 ‘2014년도 전국 415개 응급의료기관 평가’를 보면, 서울대병원 응급실 과밀화지수가 175.2%로 전국에서 가장 높고, 경북대병원(154.0%), 서울보훈병원(138.5%), 삼성서울병원(133.2%) 순입니다. 삼성서울병원은 응급실 대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2년 전에 100억 원을 들여 응급실을 대대적으로 개편했지만 환자 또한 증가해 이번에 메르스의 2차 유행 진원지가 됐다는 게 ‘청년의사’의 지적입니다. 응급실 과밀화지수가 100%를 초과한다는 건 응급환자가 대기상태에 놓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병원의 확충이 급선무이지만 이 나라의 공공 의료는 지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유 위원장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경우 공공병원들이 의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평균 70~80%이지만 한국에서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2013년에 홍준표 경상남도 지사가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하지 않았으면 이번에 그 지역 주민들에게 요긴하게 쓰였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지요.
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했지만 공공의료 강화에 대한 얘기는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의 일상생활이 하루속히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국내 메르스 상황과 정부 조치 상황을 적극
알려 한국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적극 불식시켜 주길 바란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로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라는 비상사태인데 어떻게 국민들의 일상생활이 정상화될 수 있다는 건지,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한국 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킬 수 있다는 건지... 그러니 다음 주에 한국에 오겠다는 친구에게 위와 같은 메일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아, 참, 한국에 관광 왔다가 메르스에 걸리면 문화체육관광부가 3천 달러를 준다고 했다는 말,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그 말을 덧붙여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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