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창비'는 죽었다(2015년 6월 19일)

divicom 2015. 6. 19. 08:24

한국을 '대표'한다는 소설가 신경숙 씨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뉴스'는 '뉴스'가 아닙니다. '문화 권력 창비'가 이 일에 대처하는 태도도 놀랍지 않습니다. 황교안 씨가 국무총리가 되고 새누리당이 황 후보를 총리로 만든 것처럼. 심하게 축약하면, 이 나라는 '얼굴 두꺼운 자들'이 잘되는 나라이니까요. 


신경숙 씨의 표절을 고발하는 이응준 씨의 글을 허핑턴포스트에서 읽을 때만 해도 창비에 대해 '혹시'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2008년 조경란 씨가 소설 '혀'를 출간하여 주이란 씨의 소설을 표절했다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을 때 조씨의 책을 출판한 문학동네가 보였던 태도와는 다르겠지 하는 희망이지요. 그러나 '역시'였습니다. '창비'는 해괴한 논리로 신 씨를 두둔하여 스스로 자신의 정체 -- 정당한 '비평'으로 한국 사회의 '창작'을 북돋우는 매체 --를 포기했음을 증명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돈이 궁해 -- 그렇지 않은 적이 거의 없지만 -- 창비에서 큰돈을 내건 공모에 소설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제 소설은 당연히 당선되지 못했는데, 기막힌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창비'에서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곳에 작품을 응모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혹시' 하는 희망을 가질 겁니다. 혹시 당선작으로 뽑진 않았어도 책으로 내주고 고료는 주겠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시'였습니다. 


전화를 건 '창비' 직원은 다소 '고압적인' -- 힘있는 사람들 특유의 -- 목소리로 제가 본인임을 확인하고 나서 계간 '창비'를 구독하라고 말했습니다. 참 기가 막혔습니다. 작품을 응모할 때 밝힌 제 인적사항을 이용해 '장사'를 하려 한 것이니까요. 문화사업을 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며 용서하려 했지만, 이런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얼마 후 장례식장에서 '창비' 관련자를 만났기에 그 일을 얘기했더니 제 분노에 공감해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더 가슴 아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는 사람과 '신경숙 표절 사건'에 대해 얘기하다가 제가 창비와 얽힌 불쾌한 경험을 얘기하자 그이가 자신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며, "선생님 같은 분은 그런 경우에 말도 안 된다며 구독을 거절하실 수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은 혹시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러지 못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혹시' 창비 잡지를 구독하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앞으로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없는 살림에' 창비를 구독했다며, 저 같은 사람보다는 자신 같은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했습니다.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그때의 분노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 실책은 양해할 수 있으니 그 후에도 저는 '창비' 책을 사고 읽으며 '창비'를 응원했습니다. 저는 출판사 하는 분들을 존경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나라에서 출판을 생업으로 한다는 건 대단한 의지와 소명의식 없이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책을 뭐하러 냈을까'하는 느낌을 주는 책을 내는 출판사조차 심하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은희경 씨의 단편소설 '의심을 찬양함'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제목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제목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 어디에도 그 사실이 없었습니다. 주변의 책 읽는 사람들에게 들으니 '한국 출판계에서 그 정도는 관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신경숙 씨의 표절을 파헤친 이응준 씨나, 2000년에 이미 신 씨의 표절을 <문예중앙>에 밝혔던 정문순 씨처럼 정의롭지 못해 가만히 있지만, 어떤 정의로운 이가 은희경 씨의 제목들을 좀 들여다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타락도 정도껏 하고 얼굴의 분칠도 정도껏 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타협해가며 책을 내다가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래야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 만한 출판사가 '혹시'를 두려워하여 타락을 자초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많은 사람을 잠깐 속일 수는 있고, 몇 사람을 오래 속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은 진실일 테니까요. 


'창비'가 '신경숙 표절 사건' 후에 낸 첫 번째 '보도자료' --참 영리하고 복잡하게 쓰인-- 가 독자들로부터 격렬한 분노를 불러 일으키자 '창비'는 '신경숙 씨의 작품이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는 요지의 두 번째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창비가 그런 반응을 내놓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것은 '계산'일진 몰라도 진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장에는 수많은 '창비' 책이 있지만, 이제 저에게 '창비'는 죽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저를 슬프게 하는지... 짐작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어떤 '창비' 직원이 SNS에 '창비'가 아니라 '창피'라고 했다는데, 신경숙 씨와 '창비'는 전 국민을 '창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메르스 대책'처럼, 황교안 총리를 만든 새누리당처럼, 황교안 총리처럼.

 

글 쓰는 분들, 책 만드는 분들,

더 열심히 쓰고 더 좋은 책 만들어서 '창비'의 죽음이 곧 '한국문학'의 죽음이 아님을 보여주소서! 


사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헤밍웨이가 미국을 대표할 수 없고, 노신이 중국을 대표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특정 작가도 한국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가장 잘 팔리는' 작가는 있을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