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메르스 공포에 사로잡힌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공식 방문 날짜가 다가옵니다. 조금 전 연합뉴스 기사를 보니 청와대는 ‘일정대로’ 박 대통령의 방미를 준비하고 있으며 일정 변경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로 고생하는 국민들을 생각해서 방미 일정을 조정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직후에도 아랍에미리트에 가서 원전 행사에 참석했고, 세월호 침몰 1주년인 지난 4월에도 중남미 순방에 나섰습니다.
여당을 포함한 정치권 일각에선 방미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번 방미가 워낙 중요해서 그럴 수 없을 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바빠서 16일로 예정된 정상회담을 연기하면 다시 회담 일정을 잡기 힘들고, 한국을 ‘왕따’시키는 듯한 미국, 일본의 동맹 강화, 중국, 일본의 관계 정상화를 고려할 때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또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두고 연기하는 건 외교적 결례라는 말도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 시장이 ‘메르스 방역에 집중하기 위해’ 11일부터 21일까지로 예정됐던 유럽 출장을 취소한 것을 두고도 갑론을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시민의 감염을 막기 위해 출장을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겠지요.
그러면 박 대통령은 미국에 가야 할까요, 가지 말아야 할까요? 저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오는 것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요. 미국의 ‘합리주의’에 비추어 볼 때, ‘메르스 나라’ 한국에서 오는 대통령과 대규모 수행단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과 수행기자들을 포함해 전원이 메르스 검사를 받고 감염되지 않았다는 검사 결과를 보여주며 간다고 해도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지금 박 대통령의 방미를 만류할 방법을 찾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본 미국으로서는 우리나라 의사들이나 연구원들이 내놓는 검사 결과를 믿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의사들이 박 대통령이나 수행원들을 검사하겠다고 했다가는 잠잠했던 ‘반미 시위’에 불을 붙일지도 모르니 이래저래 머리가 아플 겁니다.
1980년대 제가 정치부 기자로 외무부를 출입할 때 미 국무장관이던 조지 슐츠가 방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정부종합청사를 방문한다고 8군에 있는 개를 데려다 종합청사 엘리베이터 폭발물 탐지를 시켰습니다. 한국 경찰을 믿지 못한 것이지요. 이번에 박 대통령이 미국에 간다면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혈맹’인 미국의 입장과 한미관계를 생각한다면 박 대통령은 방미를 취소하거나 미루어야 합니다.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방미가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동북아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고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에 가면 동북아 정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착각을 하고 있거나 과대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관심을 끌 때는 미국에게 아부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꾀하며 제 목소리를 낼 때뿐입니다.
외교관계에는 ‘우방’이 있고 ‘혈맹’이 있지만,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총 없이 치르는 전쟁’이며, 미국은 이
대명제를 충실히 이행하는 나라입니다. 지금과 같은 동북아 정세에서 한국이 미국의 관심을 끌고 일본에게 빼앗긴 미국의 ‘사랑’을 찾아오는 길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뿐입니다. 대통령이 미국에 가고 안 가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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