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허트 로커와 여성의 날 (2010년 3월 8일)

divicom 2010. 3. 9. 00:26

3월 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의 날 (International Women's Day)’이지만 매스컴은 여성에게 힘을 주는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전하느라 바쁩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이날에 맞춰 펴낸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20년의 성과와 과제’ 보고서엔, 우리나라 여성의 작년 경제활동참가율이 49.2퍼센트로 1990년대 중반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지난 20년간 좁혀지지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노동부가 내놓은 2009년 여성고용 동향분석 결과도 우울합니다. 여성 비경제활동인구는 작년에 1,042만 명을 기록,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았으며, 2008년에 비해서도 28만 6천명이나 늘었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육아와 가사로 전체 이유 중 67.2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여성 취업자 수는 2003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를 기록, 작년에 10만 3천 명이 줄었는데, 남성 취업자 수가 3만 천 명 늘어난 것과 대조가 됩니다.

 

 

이들 통계는 우리나라에서 남녀평등은 아직 이루어야 할 꿈이며, 임신과 출산은 여전히 여성들의 경력에 장애가 된다는 것, 경제적 상황이 나빠질 때 남성 근로자들보다 여성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남녀평등이라는 꿈이 이루어지고 여성에게 불리하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바뀔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통계청의 ‘2009 한국의 사회지표’엔 그러한 변화의 서곡을 알리는 숫자가 있습니다. 작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82.4퍼센트)이 남학생의 진학률(81.6퍼센트)을 앞질렀다는 통계가 있거든요.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은 1986년 32.6퍼센트로 남학생보다 7.1퍼센트 포인트나 낮았지만 점차 격차가 줄어들다가 작년에 처음으로 남학생의 진학률을 능가한 겁니다. 근래에 고급공무원 시험 등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성장세를 생각할 때 양성 평등 세상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제(현지시각 7일)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열린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허트 로커(The Hurt Locker)’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음향상, 음향효과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을 휩쓴 캐서린 비글로우(Kathryn Bigelow) 감독의 성취는 우리나라와 세계의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여성감독으로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처음이지만 더 중요한 건 ‘허트 로커’라는 영화가 이라크 전에 참전한 폭탄해체반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고발하는 반전영화라는 점입니다. 비글로우는 1982년 발표한 첫 장편 연출작 ‘사랑 없는 사람들(The Loveless)’부터 ‘허트 로커’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대신 거친 액션이 난무하는 남성적인 영화나 전쟁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허트 로커’와 경쟁을 벌인 상대가 전 세계에서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내고 있는 ‘아바타’라는 겁니다. ‘아바타’ 제작에 3억 달러가 들었는데 비해 ‘허트 로커’는 겨우 1천백만 달러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두 영화는 각기 총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7개 부문에서 맞붙었으나, ‘허트 로커’가 6개 부문에서 승리했습니다.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과 ‘허트 로커’의 감독 비글로우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짧은 결혼생활을 했던 터라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의 대결이 더욱 흥미를 끌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카를로스에서 물감 공장 매니저와 사서를 부모로 태어난 비글로우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연구원이자 화가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나중에 컬럼비아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영화 이론과 비평을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타난 그는 웬만한 배우보다 아름다웠습니다. 한때 GAP이라는 상표의 의류 모델을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비글로우로부터 영감을 받는 여성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그랬듯이 여성이라는 성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외모의 아름다움 따위는 젖혀두고 집중력을 키우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여성들이 많아져 1975년에 제정된 ‘세계 여성의 날’이 추억거리가 되는 날,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