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돌아다보면 문득 (2010년 2월 1일)

divicom 2010. 2. 1. 12:40

오후 2시 반, 지하철 3호선 기차 안입니다. 전등이 켜있어도 어두운 건 승객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합실도 그랬지만 승객은 대부분 50세 이상입니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 해도 50세가 넘은 사람에겐 꿈꿀 미래보다 ‘돌아다볼’ 과거가 길고, 알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지나간 시간이 남긴 피로가 짙습니다.

마침 객차와 객차 사이의 문이 열리며 초로의 남자가 들어옵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얼른 그이가 떠나온 칸으로 옮겨 탑니다. 칸은 달라도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앉아 있는 사람, 서 있는 사람, 모두 옆 칸 사람들을 옮겨놓은 듯합니다. 나이는 차이를 지우고 같음을 강조하는 유니폼입니다. 객차 양 끝의 ‘노약자 석’은 물론이고 가운데의 긴 의자들도 모두 노인들 차지입니다. 이제는 긴 의자들을 ‘노약자 석’으로 하고 가장자리의 짧은 의자들을 ‘젊은이 석’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 얼굴들 중에도 바라보기 불편한 얼굴이 적지 않지만 나이든 얼굴들은 대체로 무섭습니다. 제일 무서운 얼굴은 늙음의 증거를 지운 얼굴입니다. 자연스레 흘러내려야 할 피부가 부자연스럽게 치켜져 있을 때 얼굴은 무섭게 왜곡된 데드마스크가 됩니다. 시선 둘 곳을 찾다가 가방에서 <돌아다보면 문득>을 꺼냅니다. <돌아다보면 문득>은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시인이 2008년에 출간한 시집입니다. 제일 먼저 6줄 짧은 시 ‘해골’을 읽습니다.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하필 월요일 아침부터, 아니 2월의 첫날부터 ‘해골’ 얘기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나이 들어 좋은 건 바로 그런 고정관념에서 놓여나 현실 또는 실존을 직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에서 배어나오는 시인의 사랑이 감동을 줍니다. 지하철 의자의 무서운 얼굴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바라봅니다. 저도 그들도 머지않아 “캄캄한 눈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게 되겠지요. 한때는 그들과 저의 눈에도 별이 빛났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목 위에 얹힌 무서운 얼굴은 무엇의 흔적일까요? 마침 몇 장 앞에 ‘흔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주민세 납부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흔적’입니다. 지상의 모든 이는 결국 시인의 ‘어머니’처럼 떠나지만 떠난 후 2년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남은 사람들의 “가슴이 마구 뛰”게 하는, 그런 ‘흔적’을 남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 ‘흔적’은 사랑만이 남길 수 있으니까요.

노년은 무엇보다 사랑을 위한 시간입니다. 걱정 많은 젊은 시절,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지 못했던 사랑을 하는 시간이지요. 젊은이의 사랑이 호르몬의 부추김을 받는, 특정한 대상을 향한 몸살이라면, 노년은 태어나 죽어가는 모든 존재를 안쓰러워하며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노인의 몸이 노쇠하고 병약해지는 건 자신의 몸이 겪는 고통을 통해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생각하게 하려는 섭리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 노인들 중엔 너무도 건강하여 죽어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출근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지하철에 등산배낭을 메고 타서 혈기왕성하게 떠드는 분들, 퇴근시간 비좁은 버스 안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즐거웠던 산행을 복습하는 분들. 무얼 먹고 무얼 해야 오래 산다고 큰소리로 장수의 비결을 주고받는 분들. 그 분들에겐 노동으로 지치고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그늘진, 너무 건강하고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 노인들에게 반감을 느끼는 젊은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30년 후엔 65세 이상 노령인구가 지금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날 거라고 합니다. 10년 후엔 역사상 처음으로 65세 이상 노인의 수가 5세 이하 유아의 수를 넘어섭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의 노화가 빠른 곳입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처음 걸으며 길을 내는 사람처럼, 한국 정부와 노인들은 다른 국가들에게 노령인구의 증가가 잉여인간의 증가가 아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부가 머리를 싸매고 노인의 보람을 북돋울 방법을 연구하는 동안 노인들은 지난 세월 동안 개인적 삶을 사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이웃과 주변을 돌아다보며 노년이 사랑의 시간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끔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의 정신과 육체가 실망스럽고, 오래 함께 산 배우자도 제 갈 길 찾아나간 자식들도 내 외로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는 늙어가는 시인의 시를 읽는 게 제일입니다. 바로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와 같은 시입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
나는 내가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사건도 사고도 많은 세상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겪어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건 축복입니다. 그 축복이 당사자 한 사람의 기쁨으로 그치지 말고 오랜 시간 후에 ‘문득 돌아다보는’ 누군가의 가슴도 뛰게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