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絶緣)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자유칼럼에 실릴 원고를 편집진에 보내고 늦은 점심을 먹는데 법정(法頂) 스님의 입적 소식이 들립니다. 어느 해 4월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셨다는 스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먹던 밥을 마저 먹습니다. “스님, 마침내 낡은 옷 벗으셨네요. 부디 안녕히 가세요.” 입으론 밥을 먹어도 마음으로 인사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젊음을 보낸 사람들은 대개 법정 스님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제가 부자가 되지 못한 건 의욕 부족 유전자의 탓과 더불어 난초 두 분(盆)을 향한 집착과 소유욕마저 부끄러워했던 스님 탓이 큽니다. 오랜만에 스님의 수상록 ‘무소유’를 들춥니다. ‘미리 쓰는 遺書’가 실린 76쪽입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문단으로 시작하는 유서에서 스님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불구인 엿장수를 속여 엿을 빼돌렸던 일을 아프게 참회합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果報)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 만한 것이었다.”
그리곤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하지 말라며 만일 그런 일을 행하면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거라고 일갈합니다. 다비식은 내일 스님의 출가 본사인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에서 치르지만, 평소에 가르치신 대로 특별한 행사는 하지 않을 거라는 송광사 관계자의 말에서 스님의 항심(恒心)이 느껴집니다. 스님이 잡지 ‘여성동아’의 요청을 받고 ‘미리 쓰는 遺書’를 쓰신 게 1971년 3월이니 꼭 39년 전입니다. 아침 밥 먹을 때와 점심 밥 먹을 때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로 넘치는 세상, 스님을 잃은 슬픔보다 항심을 잃은 슬픔이 큽니다.
스님은 그 유서에 두어 가지 원(願)을 밝혀 놓으셨습니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 군데 있다. ‘어린 王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入國査證)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내생(來生)에도 다시 한반도(韓半島)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 대도 모국어(母國語)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스님과의 이별로 슬프고 스님은 헌 옷 벗어 기쁘실 지금, 혹 벌써 한반도 어딘가에서 태어나신 건 아닌지 슬며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엊그제 쌓였던 눈이 여린 햇살에 녹고 있습니다. 길마다 눈물이 흥건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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