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시산문집 쉿 8

사랑받는 자들은 (2022년 12월 11일)

누군가에게 제가 쓴 책을 보내주기로 한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그냥 책만 보낼 수는 없고 마음 담은 몇 글자 새로 적어 함께 보내리라 생각했는데 자꾸 늦어집니다. 보내려고 꺼내둔 책을 펼치니 하필 '사랑의 슬픔1'입니다. 사랑이 슬픈 이유는 사랑받는 자들이 사랑보다 먼저 떠나가기 때문일 겁니다. 남은 자들은 자신들에게 남겨진 사랑, 사랑할 대상의 부재로 인해 슬플 수밖에 없겠지요. 사랑이 떠나며 남긴 깊은 슬픔은... 그 사랑을 만난 기쁨, 그 축복을 상기하며 이겨내야겠지요... 사랑하기 좋은 계절, 겨울. 사랑, 그 후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시길 빕니다. 사랑의 슬픔 1 사랑받는 자들은 떠나가고 사랑하는 자들은 남는다 사랑받는 자들은 언제나 사랑보다 먼저 떠나간다 -- 김흥숙 시산문집 , 81쪽

나의 이야기 2022.12.11

우리는 모두 실패했다 (2020년 7월 15일)

2020년 어느 여름날 아침 10시 40분쯤 어떤 사람이 집을 나섰다, 죽으려고. 그는 다음 날 0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가 갖고 있던 무수한 전화번호 중엔 나의 번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평생 가장 외로운 시간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 그는 우리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실패이자 우리 모두의 실패 그는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취미*거리가 되었다. *시산문집 148쪽 참조.

나의 이야기 2020.07.15

조문은 관광이 아니다: 박원순 시장 분향소 (2020년 7월 12일)

사람의 형상을 한 축생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람 시늉을 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존재는 조금도 놀랍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 진짜 인간의 수를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어젯밤 박원순 서울시장을 위한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광장이 마땅한 침묵 대신 소음으로 가득했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겠지요. 참고로 '인간'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을 뜻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 정의. 휴대전화로 끊임없이 촬영하는 자들, 함께 온 사람들과 쉬지 않고 나불대는 자들, 다른 곳에 있는 누군가와 큰소리로 통화하는 자들, 풀밭 위에 앉아 떠드는 자들, 풀밭 위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들... 축생들의 행태는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나의 이야기 2020.07.12

양평 부추 (2020년 6월 5일)

꽃처럼 어여쁜 부추 한 단을 샀습니다. 허리띠에 적힌 글자를 보니 양평 부추입니다. 왈칵 눈물이 납니다. 오년 전 아버지가 들어가 누우신 그 땅에서 자란 부추입니다. 꼿꼿한 푸른 잎은 그대로 아버지의 정신, 입안을 채우는 향기는 제 삶을 채워주신 아버지의 가르침입니다. 부추에 스민 아버지의 육신... 뵙고 싶지만 뵐 수 없고 만지고 싶지만 만질 수 없는 아버지. 양평 부추를 먹는 건 그리운 아버지를 먹는 일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온 제 속으로 아버지가 들어오십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허기 아버지 떠나신 후 끼니가 버겁더니 새벽 세 시 속 쓰리네 검버섯바나나 허겁지겁 삼키다 눈물나네 칠십구 일 전 허기에서 해방된 아버지가 보고 싶네 --김흥숙 시산문집 --

나의 이야기 2020.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