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 일곱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쉿,>,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마스크로 가린 입,
그 입을 다물자는 것이지요. '쉿'이라는 글자 다음의 쉼표(,)는
바이러스로 인해 강요된 '쉽표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이 책은 서울셀렉션 출판사의 김형근 대표님 덕에 태어났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김 대표가 문득 기획하여
태어나게 되었으니까요.
수많은 시(詩)들을 꼼꼼히 읽고 각 갈래에 맞는 표제 문장을 골라
정성스럽게 편집해 주신 문화주 편집자님과, 내용에 꼭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 주신 디자이너 이찬미 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이 책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게 노력해주실
마케터 김종현 님께도 미리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이분들의 노고 덕택입니다.
무릇 책은 편지의 묶음.
이백 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책의 시와 산문들이
반가운 편지 같은 것이 되어 위로나 웃음울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래에 책의 프롤로그를 옮겨둡니다.
이 링크를 클릭하면 책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8788283
<쉿,>
프롤로그
우리는 꽤 오래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하지 않고 남들의 성취를 우리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네모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네모난 책상에 앉혀 네모난 가치관을 주입했습니다.
인간을 배우고 이상을 키우며 실천을 연습해야 할 대학을 직업학교로 전락시켰습니다.
온가족 함께 밥 먹는 일이 드물어지며 ‘식구’는 사라지고 ‘가족’도 흩어져 한집에 사는 남이 되었습니다.
관계는 ‘인맥’이 되어 사랑도 우정도 관리해야 할 무엇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무수한 모임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앞 다퉈 모임의 일원이 되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외로워졌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위안을 찾아 회당을 찾았습니다. 함께 모여 큰소리로 기도하고 노래 부르며 외로움을 잊으려 애썼습니다. 기존 종교에서 위안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새 차로 갈아타듯 새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텔레비전, 유튜브, 책,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무수한 매체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광장이 되었습니다.
설익은 지식이 난무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목청을 높이니 세상은 날로 시끄러워졌습니다.
이런 현실을 만든 건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몸담고 있는 현실이 싫어 틈 날 때마다 가상현실로
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몸통은 크고 다리는 가느다란 사람, 댓글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만 직접 대화에는 서툰 사람들이 늘어나고, 지구촌은 ‘노마드’의 땅이 되었습니다. 늘 여행을 하거나 여행을 꿈꾸며
살다보니 모든 일이 여행 중에 본 풍경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수한 사람이 죽거나 고통받는 사건까지도.
그래도 우린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편리와 안락을 구가하며 살 만한 나날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을 멈춘 아이들이 되어 나이와 지혜는 무관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날들이 쌓여갈 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라 합니다.
온갖 부끄러움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무지는 인간 최대의 적. 마스크로 돈벌이 장난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그 어리석음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겁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이제 그만 ‘손 씻으라’고 강권합니다.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이 ‘손을 씻는 것’은
그가 하던 나쁜 일을 그만둔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비누로 손을 씻을 뿐만 아니라
그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생각하라 합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라 합니다. 남들의 박수와 인정을 좇는 방식이 옳은가 의심하라 합니다.
학교와 학원, 편의점과 분식센터를 오가던 아이들과 집안에 들어앉아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한 상에서 밥 먹으며 마음을 주고받으라 합니다.
각자 꼭짓점을 향해 달아나는 네모난 가치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품는, 누구도 어디로 달아날 필요 없는
둥근 가치관을 나누라 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이미 우리 곁에 있으니 먼 땅 그만 떠돌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이웃의 신음소리를 들어보라고 합니다.
각종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 삶의 길과 지혜를 찾으라 합니다.
함량 미달의 지식판매상들에게서 ‘강의’를 듣는 대신 책을 읽으라 합니다.
‘인맥 관리’ 하지 말고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으라고 ‘사회적 거리’를 강요합니다.
이익을 구하는 ‘인맥’의 거리는 늘 변하지만 진정한 관계는 시공을 뛰어넘으니
만나지 못한다고 약해지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 알게 합니다.
코로나19는 외로움은 본디 인간의 조건이니 홀로 이겨내라고,
회당에서의 집단 아우성을 멈추고 홀로 기도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무지와 무식을 모르고 너무 크고 단호하게 떠들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도 떠드는 자는 마스크를 쓰게 된 이유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금이라도 입 다물고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편리와 안락에 길들여진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도록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코로나19 사태는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회복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이 기회를 잃지 말기를, 인류가 반성과 근신을 통해 절멸을 피할 수 있기를,
다시는 2020년 초처럼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이 책은 세 갈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갈래는 ‘나’, 두 번째 갈래는 ‘우리’, 세 번째 갈래는 ‘너머’입니다.
첫 갈래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들여다보고, 두 번째 갈래에서는 ‘나’를 둘러싼 관계를 중심으로
우리가 우리를 관철하려 함으로써 더 큰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려 합니다.
세 번째 갈래에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는 물론 그 너머 우리가 존재를 그친 이후의 세계,
즉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생각을 확장해봅니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세 갈래 길의 끝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만나시길 빕니다.
2020 봄 김 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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