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어머니 (2012년 12월 25일)

divicom 2012. 12. 25. 11:43

크리스마스날 아침 신문에서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면 그분을 '살아 있는 부처'라고 불렀겠지요.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지요. 바로 그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살고 계신 분을 만났습니다. 


나이는 저보다 한참 아래이지만 영혼의 키가 너무 커 '그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의족의 수영선수 김세진 군의 어머니 양정숙 씨, 그분 같은 어머니가 계시니 세상은 아직 살 만 한 거겠지요? 의족을 부러뜨린 아이들과 잔인한 선생님들,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이웃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제가 읽은 기사를 읽으며 자신들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1면에 실린 '로봇다리 15살 소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분을 만나 보시지요.

 


로봇다리 15살 소년 '크리스마스의 기적'


어머니는 아들이 땅바닥을 기어 오는 것을 보았다. 2004년 겨울 이맘때였다. 반 친구들이 아들의 의족을 망치로 부숴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은 학교에서 집까지 300를 기었다. 아들에겐 두 다리가 없었다. “분노가 치밀었다고 어머니 양정숙(44)씨는 회고했다그날 저녁, 아들 김세진(15)군은 공책에 글을 적었다. ‘나는 쓰레기통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쓰레기통 옆은 항상 깨끗하다. 내가 아픔과 슬픔, 더러움을 가지고, 내 옆엔 항상 깨끗한 희망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쓰레기통이 되고 싶다.” 어린 아들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며 어머니는 울었다.


8년이 흐른 크리스마스이브, 어머니와 아들은 선물을 받았다. 아들 김군이 체육특기생 자격으로 2013학년도 성균관대 스포츠과학과 수시전형에 합격했다. 이 대학의 역대 최연소 합격자다. “기적 같은 일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전했다. 모자에겐 지난 세월 자체가 기적이었다.


양씨는 평생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일주일에 6일은 너를 위해 살지만, 하루는 남을 위해 살아라고 매일 가르쳤다. 남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한끼 밥을 굶게 하셨다.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배운 양씨는 보육시설을 다니며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다.


1998년 겨울 이맘때, 양씨는 기적 같은 일을 겪었다. 여느날처럼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를 보았다. 생후 16개월 된 아이였다. 얇은 천을 열어보니 아기는 오른쪽 무릎 아래 다리와 왼쪽 발목 아래 발이 없었다. 오른손에는 엄지와 약지만 있었다. 나자마자 버려진 아기였다.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 전엔 한번도 입양을 계획한 적이 없었어요. 포대기를 여는 순간, 아기가 너무 예쁘고 이 아이의 엄마가 돼야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운명으로 다가온 선물처럼 느껴졌어요.”


자신의 삶에 불현듯 찾아든 운명의 선물에 대해 양씨는 남편과 8살 딸에게 설명했다. 19998, 생후 24개월 된 아이를 새 식구로 받아들였다.


수군대는 이웃들이 있었다. “저런 장애를 안고 어떻게 살겠느냐는 걱정은 물론 입양해서 앵벌이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험담까지 들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혼은 또다른 어려움이었다. 양씨는 혼자 힘으로 딸과 아들을 길러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낮에는 식당에서 일했다. 새벽에는 대리운전을 했다. 세차나 건물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가의 가풍을 몸에 익힌 딸이 어머니를 거들었다. 동생보다 6살 많은 딸 김은아(21)씨가 생업에 나선 어머니를 대신해 학교를 그만두고 동생을 돌보겠다고 했다. 동생이 차가운 길바닥을 기어 오는 모습을 함께 지켜본 직후였다. 등굣길에 버스정류장에 있는 시각장애인을 돕다 지각했더니, “공부도 못하는 게 시간도 많다며 도덕교사에게 꾸지람 들은 일도 딸 김씨의 결정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한국적 정서에선 입양한 자식 돌보느라 친딸이 학교를 그만뒀다는 게 이상하겠지만. 저한테는 입양한 자식과 친딸을 다르게 대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요. 한국의 교육현실에 실망한 딸을 굳이 말릴 이유도 찾지 못했지요.” 어머니 양씨가 당시를 회고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딸 김씨는 동생을 돌보며 검정고시를 통과해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다.


모녀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겨울 길바닥처럼 차가웠다. 김군은 학교폭력, 왕따 등을 피해 초·중학교를 5차례나 옮겼다. 어느 초등학교는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교내에서 사고로 사망해도 학교 쪽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어느 중학교는 축구 드리블로 체육시험을 치르고, 두 다리가 없는 김군에게 0점을 줬다.


결국 김군은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포기했다. 대신 어머니가 아들을 직접 가르쳤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면서 운동도 병행했다. 여러 운동을 시킨 끝에 수영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물 밖에서 거동이 불편했던 김군은 물 안에서 자유로웠다.


김군은 2009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19살 미만 부문 3관왕을 차지했다. 같은 해 국내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서 10단축마라톤을 완주했다. 땅과 물을 헤치며 땀 흘리는 중에도 하루 4시간씩 공부하며 검정고시를 독학으로 마쳤다. 김군은 2009년 한국스카우트연맹이 선정한 대한민국을 이끌 4명의 청소년영웅에 선정됐다. ‘가풍은 김군에게도 대물림됐다. 마라톤대회에서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를 장애인 야학시설에 기증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김군에겐 몇가지 계획이 있다. 내년 초에는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적어 내려간 시를 모아 시집을 낼 것이다. 2016년 브라질 장애인올림픽대회에 출전해 메달도 딸 것이다. 공부도 계속해 10년쯤 뒤에는 스포츠과학 박사학위를 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도 될 것이다.


한국에서 장애인과 그 가족은 마치 코끼리 나라의 병아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늘 밟히면서도 슬퍼할 수가 없죠.” 이 가족에게 아직 슬픔은 남아 있다. 어머니 양씨는 허리를 다쳐 더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힘든 와중에도 틈틈이 사회복지학 공부를 계속해온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주부 교양강좌 등에서 강연하는 게 양씨의 유일한 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