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후배가 사는 점심 (2011년 10월 13일)

divicom 2011. 10. 13. 07:39

한 이십년 전 연합통신(지금의 연합뉴스)에 다닐 때 제 왼쪽 옆 자리에 앉았던 후배는 제 '밥'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행동, 그가 쓰는 기사마다 '시비'를 걸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슬며시 붉어지곤 했지만 맞받아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시비'의 바탕에 깔린 애정을 눈치챘던 걸까요?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지난 봄 우연히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우먼에서 휴먼으로>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그 책 몇 권을 들고 선후배 모임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피차 약속이 있어 책 한 권만 건네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조우 덕에 다시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3년 만에 연합을 떠났지만 그는 그곳의 부장이 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와 저를 보면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그는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말을 아끼며 대상과 풍경을 바라봅니다. 

 

그가 점심을 먹자기에 청계천변의 사찰음식점 '고상(尙)'에 갔습니다. 멋진 도자기에 담긴 아름다운 음식, 고기가 없다 해도 매우 비쌀 것 같았습니다. 직원들의 태도는 고상하지도 세심하지도 않았지만 인테리어는 고상했습니다. 그릇이 너무 무겁고 커서 설겆이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밥을 먹은 후엔 자리를 옮겨 커피를 한 잔씩 하고 헤어졌습니다. 밥도 맛있고 커피도 좋았지만 제일 좋은 건 후배의 여전함이었습니다. 그 여전함이 불러일으킨 기쁨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찰 음식의 힘 때문일까요, 저녁 때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그와 헤어진 후 청계천에서 광화문까지 걸어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한 권의 책을 사서 제게 선물했습니다. 훌륭한 후배가 저를 피하지 않고 만나자고 하고 좋은 밥까지 사주니 제가 아주 잘못 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제가 살 때가 있는가 하면 남에게서 대접 받을 때도 있고, 선배가 사는 점심도 있고 후배가 사는 점심도 있습니다. 제일 맛있는 점심은 훌륭한 후배가 사는 점심입니다. 박 부장,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