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선과 저는 대학 1학년 교양과정에서 만났습니다. 보이는 키는 저보다 겨우 2센티미터 크지만 보이지 않는 키는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았었지요. 지상으로 드러난 키는 작아도 지하로 뻗은 뿌리가 커 웬만한 비바람엔 꿈쩍도 않는 그런 나무 같았습니다. 반독재 바람이 거세던 1970년대 초, 그 불행한 시대 1학년 10반에서 그를 만난 게 평생 행운이 될지 그땐 알지 못했습니다.
신문사에 들어간 것도 그의 덕이었습니다. 신문기자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덕에 신문사 시험이 있는 것을 알게 되어 시험을 쳤으니까요. 제가 기자 노릇을 하는 동안 그는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15년이나 교직에 있던 그가 교육계의 정치 바람을 견디지 못해 교직을 떠날 때는 '왜 늘 진짜가 가짜들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가?' 몹시 속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1학년 여름에 만난 남자와 결혼하여 아들 딸 하나씩 낳고 행복하게 살면서도 그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끝없이 고민하여 자꾸 더 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먼에서 휴먼으로>에서 고백한 대로, 저를 대학로의 소극장에 데려가 연극 '자기만의 방'을 보게 한 것도 그였습니다. 그때 그 어둠 속에서 흘린 눈물 덕에 저는 '여성'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그가 쓴 동화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작으로 뽑혔지만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감히 짐작하자면, 동화 쓰기는 그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화작가라는 이름을 즐기는 대신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에게 더 깊은 사랑을 나누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그는 '상담'이라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는 지금 마음 안팎의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며 그들이 자유와 평안을 찾게 도와주는 상담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하게 될 때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얼마나 큰 사랑을 키워왔는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적도 있고 지금도 일 년에 한두 번 볼 뿐이지만 저는 그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그답게 하는 맑음, 부드러움, 유머, 성심, 아무렇지 않음... 그 모든 것이 1학년 10반에서 그를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제 근 일곱 달만에 그를 만나 함께 보낸 다섯 시간, 그를 보지 못하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상엔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는 '계수나무 신선'이라는 이름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목 계선, 그와 동행하니 알 수 없는 앞날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제 친구여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계선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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