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더위와 싸우며 쓴 책 <우먼에서 휴먼으로>가 출간되었습니다. 책을 낸 적은 있지만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에세이로 책을 만든 것은 처음입니다.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여자'니 '남자'니 하는 생물학적 정체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인간)'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제3의 성'을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쓴 서문의 일부를 옮겨둡니다.
"맨 처음 이 책을 쓰기로 한 건 2009년 초, 부부싸움 후에 냉전 중이던 동생 부부 때문이었습니다. 공평한 청취자가 되어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싸움의 원인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바로 남편이 남자이며 아내가 여자라는 사실이었으니까요. 조언이랍시고, 이제 ‘남자, 여자(man, woman)’ 그만두고 ‘사람(human)’으로 살라며, ‘우먼에서 휴먼으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 얘기를 책으로 쓰라고, 그런 책이 나오면 자기네 같은 부부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이 정해졌습니다.
첫 문장을 쓸 때만 해도 저와 같은 중년들에게 쓰는 편지가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목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관찰하면서, ‘우먼에서 휴먼으로’ 가야 하는 건 중년 여인들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여자든 남자든, 타고난 성(性)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류에 기여할 수 있음을, 즉 ‘잘’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 나아가서 모든 생명체를 이분화하는 ‘성(性)’이라는 단어는 ‘마음 심(心)’과 ‘날 생(生)’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性)’ 하면 누구나 생물학적인 것, 육체적인 것을 연상하지만, 본래 그 글자 속엔 육체가 아닌 마음이 있다는 거지요.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된 마음, 그것이 ‘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먼에서 휴먼으로’ 가는 것은 이 세상에 처음 올 때 가지고 태어난 마음을 찾는 여정(旅程)입니다. ‘성‘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남’과 ‘여’ 혹은 치마와 바지, 그 사소한 다름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분법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여행이란 늘 출발한 곳으로 돌아감을 생각할 때 ‘성’을 향한 여정은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여성이어서 각성(覺醒)의 주체를 여성으로 삼고, 처음에 정한 제목도 그대로 두었지만, 성(性)의 껍질을 벗고 인간이 되어야 하는 건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다른 이름은 ‘맨에서 휴먼으로’가 되겠지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한 프랑스의 지성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e)가 <<제2의 성(Le Deuxieme Sexe)>>을 출간한 게 1949년이니, 그 책은 이제 환갑을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구촌 곳곳에선 아직도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그녀의 요구를 제도화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입니다. 여성으로 하여금 ‘제1의 성’인 남자들에 의해 부차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존재, 즉 ‘제2의 성’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노력이지요. 이미 그러한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이제 추구해야 할 것은 ‘제3의 성’입니다.
‘제3의 성’의 특질은 한마디로 자유입니다. ‘여성’의 삶에 내재하던 부자유와 ‘남성’이라는 정체가 수반하는 부자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타고난 잠재력과 열망에 상관없이 사람을 규정하는 ‘여성적 삶’과 ‘남성적 삶’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시야는 넓어지고 사고는 깊어집니다. ‘멋진 여자’, ‘멋진 남자’가 되기보다 ‘멋진 인간’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사람은, 무엇이 사소하며 무엇이 중요한지 쉬이 알게 됩니다. 자연히 외양적 아름다움에 집착하거나 부부싸움에 에너지를 낭비하거나, 늙어가는 육체를 보며 비탄에 빠지거나, 에스트로겐과 비아그라를 구해 먹느라 애쓸 필요가 없게 됩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통섭(統攝)’이며, 이 정신은 소위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우르며 초월하는 통합적 인간을 요구합니다. 남녀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요소들을 두루 포괄하여 이분법을 뛰어넘는 존재, 바로 ‘제3의 성’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우먼’과 ‘맨’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휴먼’이 된 사람에겐 긴 여행 끝에 집에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기쁨과 안온함이 기다립니다. 이 책이 그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는 데 기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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