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치를 담으며(2011년 3월 30일)

divicom 2011. 3. 30. 16:45

몇 포기 남지 않은 김장김치와 두어 보시기 남은 오이김치가 밥 차리는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동네 수퍼 몇 곳을 산책삼아 돌며 배추값을 비교합니다. 연두색 그물망에 갇힌 배추는 고만고만해 보여도 값은 많이 다릅니다.

 

세 통 든 것 한 망에 9천원인 곳이 있는가 하면 만오천원인 곳도 있습니다. 그 중 한 집에서 한 통을 빼어 팔고 두 통 남은 것 한 망을 6천원에, 마지막 남은 못난이 삼형제 한 망을 8천원에 샀습니다. 모양은 좀 그래도 다섯 통을 만 사천 원에 샀으니 비싸게 산 것은 아닙니다.

 

집에 있는 함지 중에 제일 큰 것 두 개를 베란다에 내놓고, 배추 겉잎을 떼낸 후 배추를 두 조각 또는 세 조각으로 갈라 담았습니다. 한 망에서 나온 두 통은 속이 좋은데 못난이 삼형제 속에 종이 생겨 있습니다. 종이 생긴 것은 아이를 낳은 여성처럼 진을 빼앗긴 것이라 맛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종을 떼어내는데 맛없는 배추를 사서 속상하기보다는 종을 맺느라 진이 빠져 시든 배춧잎이 안쓰럽습니다.

 

함지에 물을 가득 채우고 한 시간 쯤 되니 시들었던 잎들이 모두 살아나고 물에 젖은 연두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두어 시간 있다가 물을 갈아주고 또 두어 시간 있다가 한번 더 갈아준 후 천일염에 절입니다. 석양녘엔 배추도 제법 겸손합니다.

 

흐르는 물에 씻어 대나무 채반에 포개놓은 후 무를 채썰고 생강과 마늘을 다집니다. 찹쌀풀을 쑤어 넣을까 하다가 귀찮아 양파 두 개를 갈아 양파즙을 만듭니다. 거기에 소금, 멸치젓국, 새우젓, 고추가루, 생강, 마늘, 무, 미나리 등을 넣어 섞은 후 물 빠진 배추잎 사이에 넣어 포기김치를 만듭습니다. 글로 쓰니 별 것 아닌데 할 때는 힘이 듭니다. 

 

무엇보다 힘든 건 베란다 청소입니다. 김치 담는다며 웬 베란다 청소냐고요? 베란다에서 배추를 씻어 물을 버리는데 베란다 양쪽 구석의 하수구로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베란다가 금세 얕은 시내가 됩니다. 여러 가지 장애물을 들어내고 보니 나뭇잎, 머리카락, 흙가루 같은 것이 하수구를 막고 있습니다. 배추를 씻다 말고 하수구와 베란다 청소를 하니 배추 담는데 쓸 에너지를 청소가 빼앗아갑니다.

 

속넣은 배추김치를 통에 담으니 양이 꽤 많습니다. 큰 통 하나 작은 통 하나를 채운 후엔 겉절이로 만듭니다. 김치 담기를 끝내고 동원되었던 함지들을 씻고 바닥에 떨어진 물과 양념까지 깨끗이 닦고 나니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후둘거리지만 아무 일도 안 한 집 같습니다. 세상의 주부들이 모두 이런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겠지, 마음 한편이 서늘합니다. 저보다 훨씬 불편한 환경에서 주부 노릇을 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주부의 일이 주부를 지치게 하는 건 무엇보다 그것이 '표 안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으면 표가 나지만 해놓으면 표나지 않는 일, 그것이 주부의 일입니다. 예를 들어 설겆이를 하지 않으면 표가 나지만 설겆이를 하면 일한 표가 나지 않습니다. 청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가족들이 주부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는 게 흔한 일입니다.

 

평생 밥하고 김치 담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주부 노릇, 다정한 아내 노릇, 훌륭한 어머니 노릇, 이 모든 일을 해내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 모든 일을 하면서 마음에 불만을 쌓지 않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인입니다. 이 세상엔 도인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도량(道場)'이라 하나 봅니다.

 

*'도량'의 한자(道場)는 본래 '도장'으로 읽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장'보다는 '도량'에 익숙하여 '도량'으로 읽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