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죽을 때까지 죽지 마시라 (2008년 5월 9일)

divicom 2009. 11. 2. 07:52
남해에 사는 벗에게서 선물이 왔다. 아수라 같은 세상에 눈감고 앉아 “내가 미친 것이냐, 세상이 미친 것이냐” 되뇌고 있는 걸 알았는지, 선물 중에 <은둔>이 있다. 현대의 선사 33인의 삶을 얘기하는 책, 책날개에 쓴 작가의 글이 죽비 되어 굽은 어깨 위에 쏟아진다. “이 선사들에게 은둔이란 단순히 세간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의 빛을 감춘 채 중생 속에 숨어들어 중생과 함께하는, 수행의 궁극으로서 은둔이었다.” 선물은 빚이다. 이 빚을 어찌 갚는다지?
 

삶을 지속하게 하는 빛이 되는 빚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음으로 모는 빚도 있다. 이달 들어 벌써 두 사람의 농민이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모두 소 때문이다. 아니 소 가지고 정치하는 정치꾼들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확대로 계속 떨어지는 소값, 그로 인해 늘어나는 빚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쉰 살도 못 되어 죽은 시인 김남주의 ‘농민’이 떠오른다. “공기와도 같은 것/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도 같은 것/ 물과도 같은 흙과도 같은 것/ 질소와도 같은 것/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것/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 흔해 빠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으면서도/ 내가 없으면, 1분 1초도 없으면/ 세상은 순식간에 죽음의 바다, 나는 농민이다 …”

 

시인 떠나고 14년, 세상은 죽음의 바다가 되어 가고 있는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능하니 부끄럽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 경제를 살리겠다는 장담이 박수를 받던 12월이 부끄럽고, 큰 나라 대통령이 별장으로 불렀다고 좋아라 하며 쫓아간 국가 원수와 추임새 넣어준 언론이 부끄럽고, 미국 사람들 기쁘게 하느라 대충 협상 끝에 선물 한 아름 안기고 돌아온 내 나라 관리들이 부끄럽다.

 

예산 한 푼 쓸 때마다 “국민이 낸 세금이니 함부로 쓸 수 없다”는 미국 공무원들이 원하는 걸 다 해주고 돌아와, 대개의 고위 공직자들보다 못사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미국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와 미국 사람이 먹는 쇠고기는 똑같습니다!” 사대주의적 통단 광고를 남발하는 정부가 부끄럽다.

 

미국에서 광우병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소가 한 해 40만 마리가 넘으며, 미국의 광우병 검역 프로그램만으로는 안전을 보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한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할 경우 인간 광우병, 즉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보도가 엊그제 나왔다. 1997년 동물성 사료 금지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소는 단 한 마리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미국 정부가 할 말을 대신 하던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가 부끄럽다. 무엇보다 이 정부가 국민의 투표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바로 이 모든 부끄러움 때문에, “저승길이 얼마만큼인가/ 돌아보지 말고/ 갔으면 좋으련만/ 사무친 수많은 것/ 어디에 놔두고 가야 할지” 망설이시던 박경리 선생, 더는 참지 못하고 떠나셨으리라. 그러나 선생은 허무주의자가 아니었으니, 죽는 날까지 죽어라 사시다 가셨으니, 농민들이여, 더는 죽지 마시라. 죽을 때까지 죽지 마시라! 안개 낀 산길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백성들”에게서 희망을 본 선생처럼, 비린 바람 속 꼿꼿이 촛불 밝힌 시민들, “은둔”하는 선사들에게서 희망을 건지시라. 마침내 오늘이 역사 되어 푸르른 아이들에게 오늘을 가르치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 꼭 살아 계시라. 고통 아닌 삶이 없음에서 위로를 찾으시고 부디 떠나지 마시라. 지금은 5월, 되새겨야 할 빚 많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