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그날을 기다리며 (2012년 6월 30일)

divicom 2012. 6. 30. 08:06

오늘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첫 세 줄은 한겨레에서 달아준 작은 제목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ㅎ슈퍼가 문을 닫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대기업과 상생을 생각해봅니다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지 칠년이 되어갑니다. 주변에 학교가 많으니 분위기가 좋겠구나 생각했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참말이었습니다. 하나 있던 책방은 식당으로 바뀐 지 오래고, 길에 침 뱉는 학생들과 큰소리로 다투는 어른들이 적지 않아 이곳에 왜 왔던가 후회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동네가 정겹게 느껴집니다. ㅎ슈퍼 때문입니다.

낡고 좁은 공간이지만 부지런한 주인아저씨와 책 읽는 아주머니를 보는 게 좋아 이틀에 한번꼴로 들르던 ㅎ슈퍼, 그 건너편에 재벌그룹의 기업형슈퍼마켓(SSM)이 꼭 2년 전 이맘때 문을 열었습니다. 동네 슈퍼들이 반대 시위라도 벌일세라 한밤중에 간판을 달고 슬그머니 개업하던 일이 어제 일 같습니다. 재벌이 운영하는 슈퍼의 물건이 더 좋을 거라 생각했는지, ㅎ슈퍼를 두고 그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큰 슈퍼가 문 열고 두 달도 되지 않아 ㅎ슈퍼가 문을 닫았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도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웃은 모르쇠하고 큰 부자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는구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ㅎ슈퍼는 죽지 않았습니다. 원래 있던 가게를 조금 키우고 다듬어 ‘나들가게’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큰 슈퍼로 가던 손님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중순 전국 61개 지자체가 동네 슈퍼와 재래시장을 살리고자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에 의무휴무제와 야간영업 제한조치를 내렸습니다.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 영업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한달에 두번 문을 닫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상생’을 부르짖는 재벌기업들이 운영하는 이마트·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6곳이 강동구청장과 송파구청장을 상대로 영업제한 취소 청구소송을 냈습니다. 지난 22일 서울행정법원이 두 구의 조례에 절차적 하자가 있어 위법이라고 판결하자 대형마트 의무휴무일인 24일 두 구청 관내 대형마트들과 기업형슈퍼들이 일제히 문을 열었습니다. 강동구와 송파구에서 일어난 일이 전국으로 퍼질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장치인 법이 힘있고 염치없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거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상생’을 외치는 재벌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으니 ‘행동할 수 있는 이는 행동한다. 행동할 수 없는 이는 말로 떠든다’는 경구가 떠오릅니다.

며칠 전 ‘일등주의’ 대표기업 삼성그룹이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를 불러 ‘상생’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생’과 ‘동반 성장’은 수학도 영어도 아닙니다. 양심과 상식만 있으면 배우지 않고도 이룰 수 있습니다. 낮은 가지의 열매는 키 작은 사람을 위해 남겨두고 높은 곳의 열매만 따는 키다리처럼, 대기업은 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손댈 수 없는 큰 사업을 하면 됩니다.

대기업이 대기업에 어울리는 사업을 하고, 혼자만 잘사는 것보다 함께 잘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시민이 늘고, 손님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나들이 나온 ‘이웃’으로 대접받게 되면 ‘상생’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동네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침 뱉는 학생과 악 쓰는 어른들이 줄어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 식당 빼곡한 거리에 책방 하나가 슬며시 다시 문을 열지 모릅니다. 그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