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내 친구 '공안과' (2025년 10월 20일)

divicom 2025. 10. 20. 22:02

나빠지는 시력을 보완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외출이 싫어 미루다가 마침내

지난 금요일 공안과를 찾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다가 대학 시절

처음으로 공안과에 가서 콘택트렌즈를 맞췄습니다.

콘택트렌즈는 말 그대로 렌즈를 눈의 각막에 직접

부착해 사용하여 안경을 쓸 때보다 잘 보였습니다.

 

신문 기자가 된 후엔 공안과의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습니다. 조간 기자 노릇을 하며 잠은 적게

자고 글은 많이 읽어서인지 시력이 나쁜 데다 약시였던

눈이 빨간 토끼 눈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때는 의료보험증이라는 걸 들고 병원에 갔고 병원

방문 후엔 그 보험증에 병원의 이름이 찍혔는데, 제 

의료보험증엔 온통 공안과뿐이었습니다.  신문사는

중학동, 공안과는 서린동, 모두 종로구에 있어 가기도

편했지만, 공안과를 다니게 된 건 그 병원을 세우신

공병우 박사님(1907-1995) 때문입니다.

 

그분은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로서 이 나라 최초의

안과 병원을 세우시고 한글 시력검사판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한글 타자기 (공병우 타자기)를 만드신 발명가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6.25전쟁 정전협정문 작성에 

쓰인 타자기입니다. 그분은 또 한글문화원을 세우셨고

'맹인 부흥원'을 설립해 시각장애인들의 자립을 도우셨습니다.

 

88세애 돌아가실 때는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라는 유언을 남기셨고, 사후 기증된 두 눈 가운데

한 눈은 안과 의사인 둘째 아드님 공영태 박사가 공안과에서

환자에게 이식하고 카데바는 연세대햑교 의과대학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공병우 박사님이 이런 분이니 그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안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공안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공안과 의료진은

제 두 눈의 주치의들이었고 저는 그분들 덕에 고도근시-약시

눈을 가지고도  무사히 맡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며 일이 줄고 눈병 나는 일도 줄어 공안과

방문이 뜸했는데, 고도근시의 노화로 인해 오랜만에 그곳을

찾은 겁니다. 그새 제가 다니던 서린동의 공안과는 청진동

르 메이에르 빌딩에 있는 공안과와 통합돼 있었지만 접수부

직원들부터 의료진까지, 모든 직원들의 친절과 양심적 진료는

그대로였습니다. 

 

'공안과는 내 친구다' 생각하며 병원 문을 나서는데 공병우

박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공 박사님, 박사님은 진실로 성공하신

분입니다! 1937년에 문 연 공안과가 여전히 박사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니까요!

 

아래는 나무위키에 있는 공병우 박사님 사진입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박사님에 관한 서술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namu.wiki/w/%EA%B3%B5%EB%B3%91%EC%9A%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