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치 없이 산다 (2010년 9월 28일)

divicom 2010. 9. 29. 10:32

배추 김치 없이 산 지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직장생활 초기, 어머니가 담가다 주신 김치를 먹을 때를 빼고는 늘 김치를 담아 먹었는데, 주부생활 삼십여 년에 처음으로 김치가 떨어졌어도 담아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는 옛 노래가 있는데, 저는 '김치가 담고 싶어도 못 담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엊그제 연희 홈마트에 갔더니 잘 생기지도 않은 배추 세 통을 그물망에 넣어놓고 2만 9천원이라고 했습니다. 맙소사, 배추 한 통에 만원! 깜짝 놀라 눈을 돌렸습니다. 홈마트 옆 재래시장처럼 좌판을 벌이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시든 배추가 있기에 얼마냐고 물으니 한 통에 6천 원이랍니다. 놀라는 대신 웃고 말았습니다.

 

추석 전 뱅크할인마트에선 잘 생긴 녀석 세 놈을 묶어 만 7천원인가를 받았습니다. 어떤 부인이 한 통에 6천 원을 주고 사는 걸 보고 그냥 한 통 살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배추 한 포기에 만 5천 원이라고 합니다. 무 값, 양배추 값 모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제가 백수이긴 해도 만 5천 원은 있습니다. 만 5춴 원짜리 한 통을 살 수도 있고 6천 원짜리 세 통을 에누리해 살 수도 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 뱅크할인마트에서 샀어야 하는데, 고질적인 저의 문제로 인해 사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가 뭐냐고요? '이게 옳은 일인가?' 묻는 버릇입니다. 배추 한 통에 6천 원을 주고 사는 게 옳은가 하고 제 자신에게 묻지만 않았어도 지금 우리 가족은 맛있는 배추 김치를 먹고 있을 겁니다.    

 

배추가 아무리 비싸도 그 돈이 배추를 키운 농부들에게 간다면 '이게 옳은 일인가?' 하는 자문 없이 배추를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김치가 '금치'가 될 때면 언제나 이익을 보는 건 농민이 아니고 중간상이나 도매상이라는 보도가 나오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배추값 폭등으로 재미를 보는 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제는 '반짝세일' 중인 오이와 쪽파를 사다 김치를 담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김장철이 되어도 배추나 다른 채소값이 내리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어쩌면 김장을 못한 채 겨울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김장을 하지 못하고 채소를 먹지 못하게 되면 주부들의 일손이 줄어 좋기는 하지만 내년이 걱정됩니다.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비싼 김치나 채소 대신 상대적으로 싼 고기나 생선만 먹으며 겨울을 나고 나면 범죄가 증가할 것 같아서입니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체질이 산성화되어 난폭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어쩌면 이 틈을 타고 중국 김치가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올지 모릅니다. 이래저래 한국 김치를 먹는 한국인의 수는 줄어들 겁니다. 중국 김치와 느끼한 음식을 먹다 보면 혀가 매끄러워져 중국어를 배우기 쉬워지고 오렌지를 '아륀지'라고 할 수 있게 될지 모릅니다. 아무리 나쁜 일에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김치 없이 사는 것도 슬픈 일만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