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노년일기 138: 달팽아, 미안해 (2022년 10월 23일)

divicom 2022. 10. 23. 10:40

따스한 가을 햇살 위로 가을바람이 스칩니다.

왜 '가을 햇살'은 두 단어이고 '가을바람'은 한 단어일까요?

때로는 표준국어대사전이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바람을 느끼며 걷다 보니 간판 없는 채소가게 앞입니다.

배추 세 통들이 한 망이 금세라도 구를 듯 놓여 있습니다.

겉껍질은 시들었지만 물에 담가 두면 푸르게 살아날 겁니다.

배추를 보는 저를 보았는지 가게 사장이 소리칩니다.

"배추 6천 원!" 6천 원이면 한창때 가을배추 값입니다.

 

배춧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했더니 새끼손톱보다 작은 달팽이가

두 마리나 나옵니다. 달팽이가 앉은 배춧잎 조각 채로 화분 흙에

옮겨둡니다. 하룻밤 물에 담가두니 시들었던 잎들이 본래의

초록으로 돌아옵니다. 한 통에 5,  6천 원 배추가 되었습니다. 

 

절여두었던 배추를 씻는데 초록잎 사이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나옵니다. 아이고, 어쩌면 좋아... 네 친구들은 보았는데 왜 너를

보지 못했을까, 미안한 마음으로 달팽이 몸의 소금물을 씻어내지만

달팽이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여러 시간 소금물에 있어서 죽은 것이지요...

 

살릴 수 있었는데 죽게 했구나, 그 연약한 몸으로 짠물에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렀겠구나, 내가 눈이 나빠 너를 보지 못한 걸까, 네가

불운하여 내 눈에 띄지 않은 걸까... 

 

혹시 사람들의 세상도 달팽이의 세상과 같은 걸까,

똑같은 위험에서 운이 좋은 자는 살고 운이 나쁜

자는 죽는 걸까, 사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는 것은 나쁜 것일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면 언제까지 사는 게 좋은 걸까,

죽지만 않으면 좋은 걸까... 죽는 것은 언제나 나쁜 것일까...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의도하지 않고 저지르는 잘못의 수가 늘어나는데?

 

달팽아, 혹시 내 머릿속에 가을바람을 일으키려 죽은 거야?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아 생각 바람을 일으킨 거야?

달팽아... 미안해... 다음부터 배추를 다듬을 때는 눈을 크게 떠서 

다시는 너처럼 죽는 친구가 나오지 않게 할게.

달팽아...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