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김대중 대통령의 쉰 목소리 (2022년 4월 18일)

divicom 2022. 4. 18. 16:42

김택근의 묵언

성공한 대통령이 있었다

 

김택근 시인·작가
 

2008년 10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10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사본을 흔들며 김대중 비자금의 일부로 추정된다고 수사를 촉구했다. 퇴임 대통령 김대중은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김택근 시인·작가

“한나라당 검사 출신 국회의원이 내가 100억원의 CD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있다고. 간교하게도 ‘설’이라 하고 원내 발언으로 법적 처벌을 모면하면서 명예훼손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사상적 극우세력과 지역적 편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음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고 나를 지지하는 많은 국민이 있다. 그리고 당대에 오해하는 사람들도 내 사후에는 역사 속에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2008년 10월20일)

 

그런데 정말 ‘사후에 역사 속에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국감장에서 김대중을 할퀸 주성영이다. 그는 최근 책을 펴내 용서를 빌었다.

 

“과거 필자가 국회의원 시절 폭로한 김대중에 관한 내용은 모두 허위 날조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이 책이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 무엇보다 우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용서를 빈다.”(주성영 <한국 문명사의 두 거인-박정희와 김대중>)

 

주성영은 김대중을 겨냥했던 무기를 버리고 수첩을 꺼내들었다. 김대중의 삶과 사상을 추적했다. 김대중의 업적을 문명사의 관점에서 탐구했다. 진영의 그물을 찢고 편견의 사슬을 끊었더니 비로소 김대중이 보였다. 김대중은 지구적 민주주의와 지구 공동체에 깊은 식견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한 비범한 지도자였다. 주성영은 김대중이 제3차 정보화 혁명을 성공시켜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결론지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였다. 그렇다면 김대중 민주주의의 내용과 실체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의 보편적·긍정적 문명관과 인권, 화해와 통합의 정치, 그리고 일본 문명과의 대승적 화해와 문화 자신감, 이 세 가지를 꼽았다.”(주성영, 위의 책)

 

주성영은 한국 정치의 당면과제인 양극화 해소와 국민통합을 하려면 ‘김대중의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온갖 수난에도 용서와 화해로 상생의 길을 모색했던 김대중을 본받자고 했다. 나아가 10만원권 지폐에 김대중의 얼굴을 넣자고 제안했다. 앞으로도 주성영처럼 김대중에게 투항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또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새 주인들이 한반도를 차지하면 그들은 편견 없이 역사 속에서 김대중을 불러낼 것이다.

 

흔히 해방 이후 모든 대통령은 실패했다고, 불행했다고 싸잡아 매도한다.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성공한 대통령이 있었다. 국민의 정부 5년은 역사 속에서 빛나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각 진영에서 가장 많이 찾은 정치인은 김대중이었다. 하지만 나라 경영에 실패한 무리는 성공한 김대중 정부와 자신들을 견주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의 유산을 구체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정치사도 이제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 대통령의 공과를 정치(精緻)하게 규명해야 한다. ‘정치’ 없이 어찌 민주주의가 발전했겠는가. 동강난 나라지만 현대사를 들춰보면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순간과 감동적 일화들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국 사례만 들먹이며 국내 정치를 무조건 비하하는 얼치기 지식인들이 많다. 자기 집 안에 금은보화를 쌓아놓고도 깡통을 들고 구걸만 하고 있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정국이 지뢰밭이다. 들어오는 자들은 왜 그리 뻣뻣하고, 떠나는 자들은 왜 그리 말이 많은가. 갈라진 진영에서 뿜어나오는 혐오와 증오의 살기(殺氣)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큰일이다. 국민들 갈라치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구호를 외칠 때가 있다. 무서운 일이다.

 

설렘이 사라진 정권교체를 보면서 다시 김대중을 떠올린다. 국민에게 버림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국민을 믿었던 김대중,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신을 거부하는 무리에 끊임없이 다가갔다. 지금 그가 있었다면…. 김대중은 퇴임사의 맨 마지막에 쉰 목소리로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단결합시다. 내일의 희망을 간직하고 열심히 나아갑시다. 큰 대의를 위해 협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