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꼬박 누워서 보내면 시들었던 채소가 다시 살아나듯 몸이 살아납니다.
하루 동안 보지 못했던 바깥세상이 반가운 한편으로는
책 한 줄 읽지 못한 시간들이 아까워 소리를 지르고 싶습니다.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빼냅니다. 제목이 좀 진부합니다. <나의 삶, 나의 文學>.
제목에 한자가 쓰인 것을 보면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인 듯합니다.
표지 한쪽에는 '20세기 대표작가들과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그 부제의 반대편에는 쟉가 5인의 사진, 그리고 그 아래엔 '파리 리뷰誌 인터뷰'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안정효 옮김.' 제가 처음 코리아타임스에 들어갔을 때 안정효 선배는 문화부장이셨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요? 부디 안녕하시길 빕니다.
아무데나 펼치니 아, 하필 어네스트 헤밍웨이네요.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뛰어난 작가이지만 저는 그의 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읽을 수 있고 매우 좋아하는 소설은 <노인과 바다>인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지 못하게 된 건 그 작품들이 너무나 남성성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성성으로 충만하던 때--그런 때가 있었다면--에는 그의 작품들을 읽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졸저 <우먼에서 휴먼으로>에서 얘기한 대로 저는 이미 오래전에 '여성성'보다 '인간성'을 추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밍웨이의 말을 읽어봅니다.
저도 그처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참 좋아합니다.
121쪽:
헤밍웨이: 책이나 단편을 쓰느라고 일을 할 때는 난 가능하면 날이 밝자마자 글을 씁니다.
그땐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날씨는 시원하거나 춥고, 일을 시작할 때는 추워도
글을 쓰는 동안에 더워지죠. 이미 써놓은 글을 읽어보고는 다음에 어떤 장면이 벌어질지를 알 때
항상 중단하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계속해요.아직도 단맛이 좀 남아있는 부분에 다다를 때까지 글을 쓰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아는 단계에서 일을 중단하고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될 다음날까지
삶을 즐기도록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아침 여섯 시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계속하거나 그 전에 끝냅니다.
일을 중단하게 될 때면 공허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성교를 하고 난 다음처럼
절대로 공허하지 않은 충만감을 느껴요. 나를 해칠 것은 하나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고,
내일 다시 시작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해요. 이기기 어려운 것은 내일까지의
기다림이랍니다.
128쪽: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은 한번 읽고 나면 2년이나 3년 기다려야 해요. 너무 기억이 생생하니까요.
나는 셰익스피어를 해마다 좀 읽는데, <리어왕>은 꼭 읽죠.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난 손에 닿는 대로
얼마든지 항상 책을 읽어요.
133쪽:
질문: 나이를 먹어가면서 작가의 능력이 감소된다고 믿습니까?
헤밍웨이: 그건 난 모르겠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아는 사람들은 머리가 온전한 한 밀고 나갑니다.
134쪽:
헤밍웨이: 작가는 관찰을 그만두면 끝장입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관찰을 하거나 어떻게 써먹을지를
궁리해서는 안돼요. 처음에는 그래야 할 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중에는 관찰하는 모든 것이 그가 보거나
아는 것들의 거대한 저수지에 담깁니다.
136-137쪽:
질문: 작가는 그가 사는 시대의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어느 정도까지 참여해야 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헤밍웨이: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양심이 있고, 양심이 어떻게 작용해야 하느냐에 대한 법칙은
있을 수가 없어요. 정치적인 사상을 가진 작가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만일 그의 작품이 뒤에
남는다면 독자는 정치에 관한 부분을 무시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른바 정치에 입적을 했다는 수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정치 사상이 자주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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