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난옥 형,
그걸 책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기를 쓰는 형의 모습이 우습네요. 책을 만드는 게 형의 일이니 굳이 말릴 순 없지만요.
그 편지는 한 소중한 친구와 구 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며 부끄럽게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해 본다고
써 본 겁니다. 저의 삶이란 한쪽 발이 망가진 자라가 쩔뚝쩔뚝 기어가며 만든 어지러운 발자욱(破鼈亂跡: 파별난적) 같은 볼품없는 거지요. 그래도 오직 한 사람 그분이 봐주시길 바랐고, 저를 아는 몇몇
분들이 보고 나무라주길 바랐을 뿐입니다.
일에는 세상에 알릴 일이 있고, 몇몇이만 알 일이 있고, 가장 소중한 일은 단 둘만이 아는 거 아닙니까.
지금 이곳 풍토는 세상에 알려지는 날이 곧 끝장나는 날이지요. 며칠 전 변산반도에서 새로 만난
이강산 선생님은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탄을 합디다. 사마천을 읽어보니 인간의 역사란 인두겁을 쓴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는 역사 같은데 책은 내서 뭘 하나요.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군불 넣어 생긴 잉걸을 화로에 담아 장 끓여 아침밥을 먹습니다. 양지 바른
뒷산 눈은 거지반 녹았구요. 앞산 눈은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마당과 안뜰에도 가득 쌓여 있습니다.
안녕히 계시이소.
93년 1. 21 우익 올림"
이 글은 1925년에 태어나 2004년에 돌아가신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선생이 자신의 책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첫머리에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쓴 것입니다.
전 선생이 '형난옥 형'이라 부른 이는 책을 낸 현암사의 편집자 중 한 사람입니다.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지난 겨울 눈을 생각합니다. 우리와 함께였다가 떠난 이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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