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각종 매체에 수많은 필자들의 글이 실리지만
충격을 주거나 깨달음이나 부끄러움을 일으키는 글은 많지 않습니다.
두루뭉술,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글이 대종을 이루는 시대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경향신문에 이문재 시인이 쓴 글은 달랐습니다.
'엄지장갑'을 몰라 부끄러웠습니다.
이문재의 시의 마음]우리도 더 좋은 일을 하자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마감 시한을 넘기고도 며칠 미적거렸다. 책 뒤표지에 들어가는 짧은 추천사를 쓰는 일이었다. 편집자의 주문은 간단명료했다. “두세 문장만 부탁드립니다.” 분량이 길지 않아서 미룬 것은 아니다. 원고를 들춰보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에 내가 칼럼에 소개했던 대학생의 자전 에세이 원고였다. 얼추 아는 이야기여서 굳이 완독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편집자의 독촉 문자가 잦아졌다. 더 이상 미룰 상황이 아니었다. 지난해 이 지면에 실었던 글(‘엄지장갑이 나에게 일깨워 준 것’, 2017년 2월27일 자)을 다시 찾아 읽었다. 칼럼은 한 대학생이 청각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캠페인을 벌인다는 신문 기사를 인용한 다음, ‘차이’를 존중과 배려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주장에 이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황금률을 환기시키며 마무리됐다. 단행본 원고를 다 읽지 않아도 추천사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도리가 아니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글을 써내려갔을 저자, 좋은 책을 만들어 독자와 나누고 싶어 하는 편집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끝까지 다 읽지는 못해도 중요 대목은 훑어보자는 심산으로 원고 파일을 열었다. <원종건의 엄지장갑 이야기-아직도 벙어리장갑이라 부르세요?> 자전 에세이의 첫 장면은 ‘현명한 엄마’였다. 저자 원종건씨의 어머니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데다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린 종건에게 엄마는 헬렌 켈러 같은 존재였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혹독했다. 아버지는 네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청력과 시력을 잃은 엄마와 단둘이서 세상을 헤쳐 나와야 했다. 노숙까지 해야 했던 젊은 엄마는 고심 끝에 어린 아들을 입양시키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냉대와 멸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공장에 취직해 모자(母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미혼여성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에서 어린 아들은 종종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엄마는 현명했다. 청소를 도맡아 하고 모두 잠든 사이에 어린 아들을 씻겼다. 그때 어린 아들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감사와 겸손’이었다.
사회의 변방으로 몰린 장애인이, 삶의 극지에서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장애인 가족이 감사와 겸손을 말하고 있었다. “감사는 모든 순간에 존재하며, 겸손은 최고의 순간에 존재한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한 20대 후반 젊은이의 깨달음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감사와 겸손의 차이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하다니. 원고를 끝까지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의 엄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한때 화가였던 엄마는 현명함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했다.
한 방송사의 도움으로 시력을 되찾던 순간, 엄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건아, 우리도 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자.” 좋은 일이 아니고 ‘더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 하기도 쉽지 않은데 더 좋은 일을 하자는 거였다. 시력을 회복하던 그날, 엄마는 ‘더 좋은 일’을 몸소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서약했다. 엄마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도움을 베풀 때 “내가 주고 싶은 걸 주지 말고 상대방이 받고 싶은 걸 주자”.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원고 전체가 ‘향기 나는 펜으로 쓴 글’이었다.
지난 주말 시 창작 모임이 있었다. 문예창작학과 출신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시를 합평하는 자리다. 내가 물었다. “엄지장갑이 뭔지 아십니까?”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분들이어서 금방 답이 나올 줄 알았다. 이십여 명 중에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언중(言衆)은 보수적이다. 유명인이 나서거나 다양한 미디어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신조어가 일상 언어로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사회 구조나 위계와 관련된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언어라면 더욱 그렇다. 사회를 지배하는 말과 이야기, 특히 ‘나쁜 이야기’는 매우 완고하다.
원종건씨는 학창 시절부터 ‘설리번’이라는 팀을 만들어 벙어리장갑 대신 엄지장갑이란 단어를 쓰자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벙어리장갑에서 엄지장갑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기획이기 때문이다. 감사와 겸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대방의 처지를 우선하지 않는 한 감사하는 마음, 겸손한 태도는 우러나지 않는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감사하고 겸손하자는 것은 아니다.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마음이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한다. 진정한 겸손은 오만과 불의에 둔감하지 않다.
원종건씨는 지금 한 기업에서 사회공헌 업무를 맡고 있다. 소방공무원 지원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헬렌 켈러, 아니 설리번 같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황금률을 실천한다. ‘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일일이 현장을 찾아 소방관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과 시스템을 발굴한다. 지역에 따라 소방관이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원도 소방관은 ‘눈’이, 제주도 소방관은 ‘고사리’가 문제라고 한다. 단숨에 원고를 다 읽고 나서 짧은 추천사를 써서 보냈다. “말을 바꾸면 삶이 바뀌고 이야기를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 ‘벙어리’를 ‘엄지’로 바꾸는 과정이 곧 1인 혁명이고 사회 혁신이다. 우리에겐 바꿔야 할 말과 이야기가 너무 많다. 감사와 겸손의 위력을 증명하는 이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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