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예의, 카트, 담배, 죽음 (2017년 8월 27일)

divicom 2017. 8. 27. 11:37

형편이 좋지 않을 때는 예의를 지키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무례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쁜 형편일 때만 지키는 예의는 예의가 아니고 비굴이겠지요.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형편에 상관없이 사람, 아니 

모든 생명체를 대할 때 지녀야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소위 '사람에 대한 예의' '생명에 대한 예의'이지요. 


말하는 사람이 누구든 듣는 사람이 누구든, 그들의 형편과 지위가 어떻든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형편과 상대에 따라 바뀐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고 부정입니다. 그러니 부정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들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너는 너무 세상을 몰라,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조차 이 세상은 처음 살아보는 세상일 겁니다. 각자 자신답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충고는 자신에게나 할 일이지요.


지난 수요일 처서가 지난 후 공기도 하늘도 바람도 달라졌습니다. 한 해의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찬바람 속에 

'비굴'을 쫓는 무엇이, 예의를 부활시키는 무엇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상대에 상관없이 형편에 상관없이 

항상적인 '사람에 대한 예의''생명에 대한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여름 공기를 채웠던 매미 소리가 자꾸

끊기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오늘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tbs FM95.1Mhz)'에서는 대형마트와 고향과 담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충제 달걀이 뉴스를 장식하면서 대형마트가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합니다. 높이 쌓여 있는 물건들, 카트를 

밀고 다니며 물건을 사는 사람들... 대형마트는 시간을 보내기에 아주 좋은 장소입니다. 달리 말하면 시간을 

낭비하기 좋은 곳이지요. 제가 그곳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대형마트의 카트는 큽니다. 카트의 크기는 소비자의 구매와 직결돼 있습니다. 카트가 크면 많이 사는 게 사람의 

심리이니까요. 물건으로 가득 채워진 남의 카트를 보고 자신의 카트에 상품을 추가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카트나 인생이나 남의 것은 남의 것, 내 것은 내 것인데 그것을 깨닫기가 참 어렵나 봅니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과 함께 한 '영화 읽기'에서는 스물다섯 살에 요절한 힙합 천재 '2PAC(투팍)'을 그린

'올 아이즈 온 미', 정유미, 한예리, 정은채, 임수정, 네 명의 여배우가 출연해 사랑과 관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더 테이블', '라이프' 잡지에 실린 키스 사진으로 유명해졌던 사진 작가 로베르 두아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 로베르 두아노',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기획 귀순자'를 다룬 영화 '브이아이피'를 소개했습니다. 저로선 로베르 두아노의 다큐에 가장 관심이 갑니다. 그가 렌즈로 잡은 세상이 제가 몸담고 있는 세상과 많이 다를 것 같아서 입니다.


권태현 출판평론가와 함께 한 '책방 산책'에서는 김혜형 씨의 <자연에서 읽다>와, 일본의 대표 지성으로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죽음은 두렵지 않다>를 소개했습니다. 다치바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2000년에 NHK방송의 '임사체험'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의 경험과, 나이 들며 죽음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임사체험은 삶이 제공하는 가장 좋은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임사체험은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뜻합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죽음의 얼굴을 본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과는 아주 다른 인생을 

살겠지요.


'문화가 산책'에서 소개한 행사 중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 전시회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가 가슴을 싸아하게 했습니다. '문화가 산책' 말미엔 그분들을 생각하며 고복수 선생의 '타향살이'를 

들었습니다. 서울문화재단이 작곡가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9월 17일까지 연주회를 연다는 소식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이상합니다. '프롬나드 콘서트'라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한국인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재단이 왜 한국인이 알 수 없는 말로 제목을 다는 걸까요? '우리말로 지으면 안 되는 걸까요? 


오늘 '즐거운 산책...'은 '망고하다'라는 단어로 마쳤습니다. '망고하다'는 '연을 날릴 때 얼레의 줄을 남김없이 모두 풀어주다' '어떤 일이 다 끝나서 자유롭게 되다'를 뜻합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부자유 속에 사셨다면 남은 4개월은 자유롭게 사시길 바랍니다. 아래에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제 글 '담배'을 옮겨둡니다. 오늘 들려드린 음악 

명단은 tbs홈페이지(tbs.seoul.kr)의 '즐거운 산책...'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담배

 

매일 아침 일찍 저를 깨우는 방문객이 있습니다.

바로 담배 냄새인데요,

 

범인을 잡아 그만 피우라고 부탁하고 싶지만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궁금증만 자라납니다.

 

오래된 습관일까요?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피우는 걸까요?

습관이라면 왜, 언제부터 습관이 된 걸까요?

상황 때문이라면 그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혹시 밤새 시상(詩想)과 씨름한 시인일까요?

잠 한숨 못 자고 아기나 환자를 돌보다 지친 사람일 수도 있고

그만두고 싶은 일터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피울수록 작아지는 담배처럼

습관도 상황도 줄어들다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다시 담배 냄새 없는 아침을 맞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