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비, 가을, 지하생활자, 무궁화(2017년 8월 20일)

divicom 2017. 8. 20. 11:32

남의 건물 지하에서 홀로 생활하는 아들이 놀러왔다가 저녁을 먹더니 거실에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모처럼 단잠을 자는 것일 테니 텔레비전소리를 낮춰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도 아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긴커녕 더 깊이 잠든 것 같았습니다. 

잠이 깰세라 다른 사람들도 조금 일찍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빗소리에 눈을 뜨니 거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아들이 신문지를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가 살며 일하는 지하공간은 여러 번 수해를 겪었습니다. 

여름 폭우에 물난리가 난 적도 있고, 2월 추위에 건물의 파이프가 동파돼 물바다가 된 적도 있습니다. 

물 흥건한 바닥을 말리는 데는 신문지가 가장 구하기 쉽고 유용하다고 합니다.


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를 좋아하지만 비가 오면 반가움과 함께 걱정이 찾아옵니다. 

아들의 공간이 괜찮을까 걱정하다 보면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발 괜찮아야 할 텐데... 만난 적 없는 동행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오늘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tbs FM95.1MHz)'에서는 다가오는 가을과, 

쌀쌀한 계절에 꼭 필요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는 수요일은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절기 '처서'입니다. 이제 정말 여름의 꼬리가 보입니다. 

혹시 너무 더워서 사랑하지 못했었다면 이제 다시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과 함께 하는 '영화 읽기'에서는 공포영화 '장산범', 

공영방송의 문제를 폭로하는 다큐멘터리 '공범자들', 죽음과 사랑을 다룬 스페인 영화 '내일의 안녕', 

1968년에 시작된 SF 걸작 '혹성탈출' 시리즈의 최종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소개했습니다. 

'혹성탈출...'을 보고 싶습니다. '인간의 퇴화와 유인원의 진화'가 어떻게 영화로 표현되는지 궁금합니다.


권태현 출판평론가와 함께 하는 '책방 산책'에서는 김애란 씨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과, 

심리학자 줄리아 쇼의 <몹쓸 기억력>을 읽었습니다. <몹쓸 기억력>에서는 우리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일수록 

정확하지 않고 왜곡됐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제게도 '확실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는데, 혹시 그것들이 왜곡된 것은 아닌지 돌이켜봐야겠습니다. 


'문화가 산책'에서는 고 성창순 명창의 유품 1295점이 국립국악원에 기증됐나는 소식, 8월 14일 '세계 위안부의 날'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일생이 만화 <풀-살아있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으로 출간됐다는 소식, 종로도서관에서 '제자백가의 인생 공부'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오늘 '즐거운 산책...'은 '배추하다'로 마쳤습니다. '배추하다'는 '지위가 높거나 귀한 사람 앞에 공손하게 

총총걸음으로 나아가다'를 뜻합니다. 저는 김치 담그는 배추는 좋아하지만 '배추하다'는 절반만 좋아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 총총걸음으로 나아가는' 건 좀 이상하니까요.


오늘 들려드린 음악 명단은 tbs홈페이지(tbs.seoul.kr) '즐거운 산책...'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제 글 '무궁화 거울'을 옮겨둡니다.


무궁화 거울


서울로 7017, 독립기념관, 천리포...

곳곳에서 열렸던 무궁화축제는 끝났지만

무궁화는 여전히 피고 집니다.

 

자동차 매연이 그치지 않는 대로변에서나

수다가 끊이지 않는 골목에서나 무궁화는

구도자의 거울처럼 맑고 그윽하게 피었다가

입을 꼭 닫고 떨어집니다.

 

하양, 보라, 분홍... 같고 다른 아름다움에 감탄하다 보면,

무궁화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늘 여기 있었는데 갑자기 웬 수선이람?’

 

그러게요, 늘 한 자리에 있던 무궁화를

왜 이제야 발견할 걸까요?

무엇이 눈을 가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걸까요?

이제부터라도 매일 무궁화 거울에 저를 비춰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