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백기완, 문정현, 그리고 '가훈'(2016년 7월 10일)

divicom 2016. 7. 10. 18:06

오늘 서울 기온은 섭씨 33도를 넘었지만 마음이 끄는 대로 햇살 속으로 나갔습니다. 백기완 선생님과 문정현 신부님의 글과 서각이 전시 중인 통의동 '류가헌' 갤러리에 가고 싶었습니다. 청와대 부근 동네 골목에 꼭꼭 숨어 있는 

사진 전문 화랑, 문을 들어서니 오른 쪽 방에는 문 신부님의 서각이 아름답고, 왼쪽 방에는 백기완 선생님의 글씨가 자유로웠습니다. 이 나라가 아닌 곳에 태어나셨다면 두 분이 예술가로 평생을 보내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각은 아기자기한 것부터 조금 큰 것까지 다양했습니다. 작품 사이를 걷고 있을 때 문 신부님이 신도 가족인듯한 가족과 말씀을 나누며 그 작은 방으로 들어서셨습니다. 감사의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축하의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1990년대 초 뵈었을 때보다 야위셨지만 기운은 그때처럼 젊으셨습니다. 


서각들과 작별하고 작은 마당을 건너 왼쪽 방으로 들어가는데 방 입구 작은 공간에 백기완 선생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여든을 훨씬 넘기신 선생님을 뵙고도 입으로 인사하진 못하고 그냥 고개만 숙이고 말았습니다. 시내 한복판 시위행렬 앞에 서 계시던 저 작은 몸... 당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저렇게 남은 것 없이 되셨는데도, 이 사회는 선생님의 남은 것마저 가져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송구한 마음에 눈이 자꾸 젖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이 선생님의 붓을 통해 내려 앉은 액자마다 선생님의 눈빛이 형형했습니다. 약한 자에겐 사랑이고 악한 자에겐 추상 같은 매질일 터... 언제까지고 그 방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모든 글이 다 '가훈'이 될 만한 글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나니'라는 말씀이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술이나 문화는 정치나 사회적문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아침 tbs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에서도 '두 어른 전'을 소개했습니다. 내일은 월요일이라 화랑이 문을 닫지만 17일까지 계속하니 꼭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쉼터 '꿀잠'의 건립 기금을 만들기 위해 두 어른이 내놓으신 작품으로 하는 전시회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에는 이미 빨간 딱지가 붙었으니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이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촛불 노릇을 하겠지요. 아직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가 아니면 보기 어려울 테니 가 보라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작품을 안고 오진 못하고 두 분의 작품 사진이 실린 도록만 한 권 사 들고 왔습니다. 

각기 자신의 형편에 맞춰 마음을 표현하고, 도록도 살 수 없는 형편이라면 두 어른께 인사만 드려도 가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오늘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에서는 '가훈'에 대해 생각해보고,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집 <결혼>에 실린 에세이 '알제(리)의 여름'을 읽으며 어떨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카뮈는 프랑스 령 알제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평생 그곳을 사랑했습니다. 1942년에 발표한 명작 <이방인>도, 오늘 읽은 에세이도 배경은 모두 알제리입니다. 


카뮈는 '삶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타오르는 것이다. 반성도 향상도 문제되지 않는다. 지옥의 관념도 여기서는 

애교 있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럴듯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반성하고 종교를 찾는 대신 주어진 순간을 즐긴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현재에 전적으로 몸을 맡기고 있는 이 백성은 신화도 위안도 없이 살아간다.”는 구절도 있고, “20세기 이래 인간은...예의바르기 위해 애써 왔고 육체를 죽이고 의상을 복잡하게 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라는 말도 나옵니다. 카뮈는 자기 친구 뱅상에 대해, 그는 목이 마르면 마시고 여자가 생각나면 함께 잔다. 여자를 사랑하면 결혼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뱅상이 여자였으면 남자가 생각나면 함께 잔다. 남자를 사랑하면 결혼할 것이다라고 말했겠지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알제리에는 아주 특수한 도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거역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을 존경받게 하고 임신부에게는 경의를 표한다. 한 사람의 적에게 두 사람이 덤비지 않는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니까. 이런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이래서 만사는 해결된다. 나는 이것이 정당하고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면서 본성에 충실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아주 다릅니다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세워야 할' 미래를 위해 살다보니 현재를 잃어버리게 되고 비겁한 일도 자주 하게 

됩니다. 카뮈는 이 에세이에서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순수한 인간이 되는 것은 한층 힘든 것이다.’라고 하는데, 우리 한국인들도 가끔은 생각을 멈추고 뜨거운 햇살이나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기며 순수를 체험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아래에 제 칼럼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가훈'을 옮겨둡니다. 


오늘 첫노래는 들국화의 '우리', 오늘의 노래는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 마지막 노래는 Aphrodite's Child의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이었습니다. 모든 곡의 명단은 tbs 홈페이지(tbs.seoul.kr) '즐거운 산책...'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훈


아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어느 날 물었습니다.

우리 집 가훈이 뭐에요?”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입이 답했습니다.

우리 집 가훈은 웃자!’”

웃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가훈을 붓글씨로 써서 가져가야 한다기에

먹물에 붓을 적셔 웃자를 써주었습니다.

(시옷)’ 받침의 두 다리 중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은 웃자’...

선생님, 학생 할 것 없이 보는 사람마다 웃었답니다.

 

다른 집의 가훈은 근면, 성실, ‘하면 된다이던데

왜 우리 집 가훈은 웃자에요?” 아이가 물었습니다.

그때는 웃는 게 좋잖아하며 웃어넘겼지만

이제 아이도 어른이 됐으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근면하고 성실해도 물려받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웃으면 복이 오고 젊어진다니까 너무 애쓰지 말고

늘 웃으면서 네 식으로 살아.’

 

언젠가 아이에게도 아이가 생겨 가훈을 묻거든

우리 집 가훈은 웃자야!’라고 답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