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비데, 에어컨, 그리고 체르노빌(2016년 6월 17일)

divicom 2016. 6. 17. 10:01

날씨가 더워지면서 에어컨을 튼 곳이 많아지니 자연히 전기 생각을 하게 되고, 전기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핵발전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날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려면 핵발전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지만, 왜 전력 수요의 증가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기를 낭비한다는 의식 없이 전기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낭비가 초래하는 '수요'를 

피할 수 없는 '수요'라며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산업체에 부여하는 전기요금 특혜를 없애고, 도시 도처에서 전기를 잡아 먹고 있는 비데와 에어컨을 줄이기만 해도 '피할 수 없는' 전력 수요의 가파른 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아래의 글은 환경 전문가이기도 한 김수종 선배가 지난 3월 자유칼럼에 쓰신 글입니다.  




www.freecolumn.co.kr

울림이 큰 ‘체르노빌의 목소리’

2016.03.09


모레, 3월11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가 발생한 지 5년째 되는 날입니다. 거대한 파도가 제방을 넘어 도시와 산야를 삼키던 쓰나미의 모습이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처럼 뇌리를 스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나 더욱 전율할 일은 지진해일에 의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이 남긴 파장입니다. 아직도 방사능 누출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 땅, 바다, 공기 그리고 주민의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자세히 모릅니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 후쿠시마의 비극입니다.

얼마 전 읽은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후쿠시마 사고와 연결되며 우울한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986년 4월 26일 구 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원자로가 녹아내리면서 배출된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이 아닌 다큐멘터리인데도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오럴 히스토리(Oral History) 기술(記述)형식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대개 저자가 현장을 누비면서 취재한 자료를 나름 해석하며 설명해나갑니다. 하지만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00퍼센트 증언자의 녹취록을 독백 형식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오럴 히스토리의 진수라 할 수 있습니다. 증언자들의 독백을 통해 죽음, 출생, 가족, 사랑, 권력, 무지 같은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원자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구절을 소개합니다.

“그날 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하늘에 솟은 화염을 보았다. 남편이 셔츠 바람으로 나가면서 ‘원자로에 불이 났다. 곧 돌아올 테니 창문 닫고 들어가 자고 있어.’라고 말했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병원에 실려 간 걸 알고 병원으로 찾아갔다. 간호사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남편을 간호하려는 나에게 말했다. ‘이건 더 이상 당신 남편이 아닙니다. 방사능 물질이란 말입니다.”(처음 출동했던 소방관의 아내)


“체르노빌은 전쟁 중의 전쟁이다. 숨을 곳이 없다. 지하에도 수중에도 공중에도 숨을 곳이 없다.”


“사고 한 달 후 체르노빌의 쇠고기는 쇠고기가 아니라 방사능 부산물이었다. 우유도 방사능 물질이었다.”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원자력연구소 수석엔지니어)


“이웃에 사는 의사는 애를 데리고 내일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문은 곧 상황이 좋아진다고 보도했다.”(교사)


“어린 딸을 데리고 민스크의 동생 집으로 피난을 갔다. 모유로 아기를 키우던 동생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역에서 잤다.” (주민)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전문이 왔다. 공포확산을 막으라고. 모스크바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선 아무도 사고의 본질을 몰랐다. 참석했던 장군 하나가 ‘방사능 피폭이 뭐요?’라고 말했다. 공산당이 명령하면 핵반응이 멈출까.” (지역 공산당 제1서기)


“4월 29일 민스크 하늘엔 핵구름이 끼었다. 거리에선 상인들이 파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팔고 있었다. 대책 촉구를 위해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황급히 찾아갔다. 유명 시인과 만나는 중이라며 비서는 나를 기다리게 했다. 한참 후에 그 시인이 나왔다. 나도 아는 시인이었다. 그 시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제1서기와 나는 벨라루스 문화에 대해 논의했소.’”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핵연구소 소장)


원전폭발사고는 그 순간의 위력보다 방사능 피폭에 의한 피해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죽음 자체는 오히려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피폭 환자들의 고통은 커가고, 피폭자가 낳은 아이들은 각종 암과 치명적인 질환에서 일생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피폭환자, 가족, 정부 공무원, 소방관, 원자력연구소 책임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후쿠시마의 미래는 물론 어쩌면 일어날 미래의 원전폭발 사고의 고통을 미리 말해주는 예언서와 같습니다.

올해 들어 핵에 대한 뉴스가 언론을 덮고 있습니다. 연초부터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궤도에 진입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핵문제를 최대 안보 이슈로 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핵 무장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만 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핵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약 150척이 바다 밑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지구를 몇 번 파멸시킬 수 있는 핵전력입니다.

전 세계의 핵발전소는 450기에 이릅니다. 우리나라는 25번째 원자로 가동을 앞두고 있습니다. 중국은 황해연안에 원전으로 띠를 두를 요량으로 원자로 설치 계획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핵시설에서 전쟁이 아닌 인간의 오류나 자연재해에 의해 방사능 대량 누출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어느 국가도, 어느 발전회사도 자신의 관리 영역에서 핵 안전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핵 선진국에서 최고 위험등급의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한국인은 이제 당분간 운명적으로 원자로를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방사능누출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가공할 피해를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로 미루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에서 보았듯이 발전소가 소재한 우크라이나보다 이웃나라인 벨라루스가 더 큰 재앙에 직면했다는 것은 시사점이 큽니다.

국가원수, 에너지관련 장관,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안전 관리기관은 한국에도 큰 방사능누출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험을 항상 인식하며 대비할 때 위기를 줄일 수 있고, 또한 위기가 찾아와도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위험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원자력 발전 비율을 줄이고 대체방안을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그룹은 특정한 주의나 입장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