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변월룡과 레슬리 드 차베즈(2016년 3월 29일)

divicom 2016. 3. 29. 09:06

지난 주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변월룡(Pen Varlen: 1916-1990)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이제 북촌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레슬리 드 차베즈(Leslie de Chavez: 1978-)의 개인전에 가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한 사람은 아직 청년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 사이에 통하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전시회가 진행 중인 덕수궁과 북촌은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물론 사람이 적은 시간에 가야겠지요.

 

우선 변월룡 전시회를 주최한 국립현대미술관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에서 화가로 교수로 살다간 변월룡은 소위 '고려인'으로, 우리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미술관이 '한국 근대거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그를 소개한 것입니다. '한국 근대거장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진행 중인데, 이미 이중섭(1916-1956)과 유영국(1916-2002)의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중섭, 유영국, 변월룡, 모두 1916년에 태어나 그림을 그렸지만, 그들의 그림은 판이하게 다르고, 저는

세 사람 중 변월룡의 그림을 가장 좋아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변월룡의 존재를 처음 알았는데, 그의 초상화와 풍경화를 보니 제가 그와 같은 

20세기 사람이며 같은 뿌리를 지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전시장 한쪽 방에서는 그의 일생과 작품을 소개하는 비디오가 상영 중인데, 그 비디오를 보니 눈물이 절로 나왔습니다.


변월룡이 살아있던 시절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이었고, 그는 소련에서도 유명한 최고의 미술학교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회화, 조각, 건축 아카데미(1764년 설립)' 를 졸업하고 그곳의 교수로 일했습니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초상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는 평을 받는 변월룡은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모두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렘브란트를 좋아하는데, 변월룡을 렘브란트와 비교하는 평론가가 있는 게 전혀 놀랍지 

않았습니다.


변월룡은 1953년 소련 정부의 지시로 북한에 파견되어 전쟁으로 파괴된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며 북한의 

예술가들과 교류했으나 약 15개월 후 귀국해야 했고, 그 뒤엔 정치적 이유로 북한으로부터 입국을 금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에칭이 많은데, 북한을 주제로 한 에칭은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며 제작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 가슴을 파고 드는 건 구불구불 뒤틀린 우리나라의 소나무 그림입니다. 

변월룡 전시회는 5월 8일까지 계속되니 꼭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변월룡 전시회는 좋았지만, 덕수궁 현대미술관은 여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도 그렇고 대부분의 

시립, 국립 미술관에 가면 느끼는 것이지만, 아트숍이 아트숍이 아닙니다. 변월룡 전시에 관련된 것은 4만 4천원 

짜리 도록, 어떤 평론가가 쓴 변월룡 관련 책 한 권, 2천원짜리 포스터가 전부였습니다. 아트숍은 전시회를 본 사람들이 전시의 여운을 음미하기 위해 들르는 곳입니다. 아트숍에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 있어야 하고, 아트숍의 

직원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적 분위기'를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사동이나 남대문시장에 가면 살 수 있는 물건들을 현대미술관 아트숍에 전시, 판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북촌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차베즈 전시회는 필리핀의 현대미술을 맛볼 수 있는 전시회일 뿐만 아니라, 

왜 '정치적이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지 알게 해주는 전시입니다. 겨우 서른여덟 살인 차베즈의 

통찰과 패기가 '이성이 잠들 때(The Sleep of Reason)'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전시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는 2011년 말 '신은 바쁘다(God Is Busy)’는 제목의 전시회를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최한 바 있습니다.


제목이 시사하듯, 그는 정치, 종교, 사회적 부조리와 위선, 폭력 등에 대한 분노를 완성도 높은 회화와 설치작업으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전시 제목 '이성이 잠들 때'는 스페인의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이성이 잠들 때 비이성적인 괴물이 삶을 지배한다이성의 각성만이 이 창조물들을 마침내 사라지게 할 것이다'에서 

차용했다고 합니다. 내일은 고야의 생일입니다. 때맞춰 '이성이 잠들 때'를 보면 좋겠지요.

 

차베즈는 "내 작품은 필리핀 사회가 당면한 사회문제를 재조명하면서 내면적 사색을 얻어내는 것"이라며 "예술이 사회모순과 부당한 처우에 대응해야 진정한 인간 해방이 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젊은 작가들 중에도 차베즈 같은 사람이 여럿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차베즈의 전시는 5월 1일까지 계속되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꼭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