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지난 9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었습니다. 미역국과 쑥설기, 케이크를 들고 아버지의 새 집을 찾아갔는데, 묘소 양편 꽃 항아리가 텅 비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두루 살펴보니 아버지의 꽃이 몇 걸음 떨어진 남의 묘소 앞 항아리에 꽂혀 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남의 꽃을 자기 조상 묘에 가져다 꽂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이니... 잠시 ‘영일 정씨 가족묘’의 주인들을 의심했습니다.
묘지관리소에 연락하니 직원 한 사람이 한달음에 달려와 설명해주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항아리의 꽃들이
날아가 아무데나 떨어지고, 그러면 관리인들이 꽃을 집어 가장 가까운 묘의 항아리에 꽂아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꽃들이 보였습니다. 생화는 금세 시들다 보니 묘소의 꽃들은 모두 조화입니다. 봄엔 바람이 자주 부는데다 산바람은 동네 바람보다 세니 꽃이 날아간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직원은 “꽃이 저렇게 떨어져 있으면 저희는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니 가장 가까운 묘에 꽂을 수밖에 없어요.”하고 설명했습니다. 온 가족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영일 정씨 가족묘’의 주인들에게 미안해 했습니다. 아주 잠시나마 그분들을 의심했으니까요. 납득할 만한 설명으로 의문이 해소되고 나니 모두 개운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했습니다.
아버지 묘소의 꽃 사건은 명쾌한 설명 덕에 모두를 미소 짓게 하고 끝났지만 세상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현지시각으로 어제 워싱턴 D.C.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15분’ 동안 정상회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 먼 곳까지 갔는데 소위 ‘혈맹’우방국의 대통령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만났다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어쩌구저쩌구만 해도 10분쯤은 흘러갈 것 같습니다. 통역까지 쓰니까요. 그런데 양국 정상은 그 15분 동안 북한의 도발 위협과 북핵에 대한 대응, 대북 제재 방안 등을 논의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한 강력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재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회담이 길어져 박 대통령이 근 한 시간이나 대기했다고 합니다. 외교관계가 있는 나라 사이에서 예정됐던 정상회담이 갑자기 한 시간씩 연기돼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한 시간이나 기다리는 법은 없습니다. 큰 사고가 난 거라면 몰라도 그건 그 나라를 아주 우습게 보는 처사입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가끔 외교적 결례를 저질러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지만, 이번엔 푸틴도 아닙니다.
헤럴드경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현지시각으로 어제 오후 북핵 연쇄회담의 마지막 일정으로 오후 4시(한국시간
오전 5시)부터 한중 정상회담을 열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계획보다 길어져 박 대통령이 예정보다 57분이나 늦게 시진핑을 만났다고 합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한 시간 늦게 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각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관련(대북) 결의를 전면적으로 완전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저는 두 사람이 북한에 대해 나눈 얘기보다 시 주석이 박 대통령에게 어떻게 사과했는지, 사과하기는 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외교는 '우아한 형식으로 벌이는 전쟁'이기 때문에 ‘형식’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시 주석은 ‘형식’을 무시했습니다. 한국의 언론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시 주석이 한 시간이나 늦은 것은 시 주석과 오바마 대통령의 이견 때문이었다고 보도하는데, 시 주석이 만나야 할 사람이 독일의 메르켈 총리였어도 시 주석이 한 시간이나 늦었을까요? 대통령을 수행 중인 우리 기자들 중에 시 주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외교관 중 누군가는 이 외교적 결례에 대한 심심한 사과를 요구했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었을까요? 거의 모든 한국 언론이 오바마 대통령과 시 주석의 이견 때문에 시 주석과 박 대통령의 만남이 한 시간 가량 늦어졌다고 보도하는데, 그건 누구의 해석일까요? 그건 과연 사실일까요?
부디 기자들 중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기 바랍니다. 의심하지 않는 기자, 묻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고,
질문하지 않는 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결코 들을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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