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무나 못 만드는 통장(2015년 3월 24일)

divicom 2015. 3. 24. 09:43

어제 통장을 정리하러 은행에 갔다가, 통장을 만들려다 만들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입금과 출금이 자유로운 보통예금 통장을 만들려고 하셨는데, 은행 직원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통장을 만들 때는 어떤 목적에 쓸 것인지를 밝혀야 하고, 그것을 증빙하는 서류를 제출해야만 통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월급 받는 통장, 자동이체용 통장, 적금 불입용 통장 하는 식의 목적입니다. 


은행 창구에 비치된 인쇄물을 보니 그 은행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시책을 3월 10일부터 시행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저는 이 새로운 시책에 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신문도 읽고 방송 뉴스도 거의 

매일 보지만 이 소식을 놓친 겁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보통예금 통장도 마음대로 못 만드느냐?" 며 고개를 

저으시는 게 당연했습니다.    


통장 발급을 제한하는 건 통장을 이용한 사기나 갈취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일지 모릅니다. 남의 통장을 이용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새로운 시책이 나온 배경에 상관 없이 기분이 나빴습니다. 자유가 줄어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임용 통장에 관한 항목에 따르면, 모임의 성격과 정체를 은행에 알려야만모임용 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은행에 이로운 일을 하면서 은행에 비밀(?)까지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겁니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당그랴?' 하는 속담이 있지만, 이 나라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시책이 잦습니다. 

수학여행 길에서 학생들이 죽으면 수학여행을 없애고, 캠프장에서 불이 나면 캠프장을 없애고, 통장을 이용한 

범죄가 늘면 통장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정말 중대한 경제 범죄는 통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통장은 추적이 가능하니 큰 도둑들은 

통장을 사용하지 않고 작은 도둑들만 통장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통장을 만들기 힘들어지면 5만 원짜리 돈과 미국 달러가 더 많이 필요해질지 모릅니다. 5만 원짜리를 만든다고 

할 때 우려한 것처럼 그 돈을 애용하는 건 부패한 공직자와 기업가들, 정치인 들입니다.  


통장 만들기가 힘들어졌으니, 사기꾼에게 속거나 돈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있는 통장을 팔아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취업은 못했지만 통장을 만들고 싶은 젊은이들이 은행에서 한 번 더 

상처 받지나 않을까 마음이 쓰입니다.


우리는 지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어제 발표한 '2014년 자금순환(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 기업, 정부 등 경제주체들의 금융부채는 전년대비 273조원 증가해 4423조원에 이르렀습니다. 계속되는 경제 침체는 대부분의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청년층의 고통은 전체 평균의 2배 이상이며 특히 

서울 거주 20대 저소득층 여성이 느끼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1007명에게 직접 물어 산정한 올해 1분기 체감경제고통지수는 19.5포인트로, 정부의 공식 통계치로 계산한 -1.6포인트보다 21.1포인트나 높다고 합니다. 정부가 

지난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8퍼센트라고 발표했지만 실제 체감 물가상승률은 3.3퍼센트였던 것과 같은 

것이지요. 서울 지역의 고통지수는 높고 체감실업률이 낮은 영남 지역의 고통지수는 낮았으며, 20대의 체감고통지수가 높은 까닭은 체감 실업률이 37.5퍼센트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범죄를 막기 위해 통장 발급을 어렵게 했다면 이해할 수는 있지만, 푼돈을 모아 독립자금이나 창업자금을 마련하려는 젊은이들이 통장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열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예외조항을 두면 또 그 조항을 악용,

또는 남용하겠지요... 앞날이 아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