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빼놓을 순 없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나라가 군사독재의 암흑기를 지날 때 정의구현사제단은 하나의 촛불이 되어 자신을 살라 나라를 구하려 애썼습니다. 진정으로 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라면 의당 정의구현사제단과 같이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의 '신자'들은 '공적인 선'인 '정의'보다 자신과 자기 가족의 유복 등 '사적인 선'의 추구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여전히 존경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은 사설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40년을 치하했습니다. 아래에 그 사설을 옮겨둡니다.
‘고통의 친구’ 정의구현사제단이 걸어온 40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22일 창립 40돌 기념미사를 올렸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엄혹하고 어두운 시절 한 줄기 등불과 같이 나타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증인이고 주역이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김승훈·함세웅 등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돼 그해 9월26일 결성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이후 사제단은 반유신독재 싸움에 앞장섰다.
1980년 5·18 직후에는 살기등등한 신군부 군홧발 아래서 광주학살 진상을 발표했으며 19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조작을 폭로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사회의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사제단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2007년에는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했으며,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시국미사 등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역주행을 비판했다. 또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제단이 있었다. 사제단의 예언자적 활동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계속됐다. 지난해에는 국가기관의 대선개입과 국정원의 여론조작을 비판하는 시국미사를 잇달아 열었으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에는 광화문에서 8월25일부터 열흘 동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전국 사제·수도자 단식기도회를 열었다. 이렇게 지난 40년 동안 정의구현사제단은 고난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고통 앞에는 중립이 없다’, ‘교회는 약자들을 돕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이야말로 이 말을 일찍부터 앞장서서 행동으로 실천해왔다고 할 수 있다. 눈여겨볼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젊은 사제들의 끊임없는 충원으로 저변을 넓히며 노장청의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사제단의 활동에 천주교 수도자들이 적극 동참하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광화문 세월호 단식기도회에 100명이 넘는 수녀들이 내내 함께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한국 민주주의·인권 역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중차대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사제단에 요구하는 바는 여전히 많다.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사제단이 탄생했는데, 40년 뒤 다시 나라가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사제단이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기여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제단의 올곧은 실천 40년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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