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소문난 제주도가 지금 소나무 재선충과 전쟁 중이라고 합니다. 정치판 소식이나 돈의 향방을 좇는 데는 혈안이 되면서 이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언론기관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마침 제가 존경하는 김수종 선배가 오늘 자유칼럼에서 이 문제를 다루셨기에 전재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정부와 언론과 국민... 꿈 속에만 있는 걸까요?
|
제주도 관광을 갔다 온 사람들 중에는 산방굴사(山房窟寺)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해안가에 불쑥 솟아오른 해발 395미터의 산방산은 제주도 전역에 산재한 360여 개의 오름 중 하나지만 생김새가 독특합니다. 꼭대기에 분화구가 없는 종 모양의 뾰족한 조면암 바위산으로 우람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
|
이 산방산의 남서쪽 중턱 해발 150미터에 커다란 동굴이 있습니다. 길이 10미터, 폭과 높이가 5미터나 되는 이 동굴은 고려의 승려 혜일(慧日)이 수도했다고 하는 산방굴사입니다. 산방굴사에서 산 아래를 굽어보면 마라도가 물고기처럼 떠 있고 그 너머에 동중국해의 대양이 펼쳐집니다. 이 환상적인 경치를 옛사람들은 영주10경(瀛州十景)의 하나로 찬탄했습니다. 영주는 제주 섬의 옛 이름입니다.
산방굴사의 경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동굴 입구에 서 있는 500~600년 수령의 노송(老松)입니다. 쭉쭉 뻗은 가지도 멋있지만, 코끼리 입처럼 휑하니 뚫린 동굴 입구를 마치 부채로 얼굴을 가리듯이 서 있는 것이 이 소나무입니다.
이 노송의 운치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은 제주도를 일주하고 탐라순력도를 그리게 했는데, 화공이 유별나게 클로스업시켜 그린 소나무 모습이 지금에도 300년 전의 무게와 기상을 느끼게 할 정도입니다. 170년 전 제주 유배 생활을 하며 세한도를 그렸던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와 지척인 산방굴사를 자주 찾았고, 초의(艸衣)선사는 친구 김정희를 위로하러 왔다가 여러 달 산방굴사에서 수행했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 소나무를 인상 깊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나무가 작년 잎이 벌겋게 변하면서 시름시름 앓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노송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병은 바로 소나무 재선충(材線蟲)입니다. '소나무 에이즈'라는 별명이 붙은 재선충에 걸린 소나무는 그대로 두면 그 재선충이 주변 소나무로 감염되기 때문에 잘라 내든가 방재 처리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산방굴사를 지키던 소나무는 이제 그 형해마저도 그냥 두고 볼 수 없게 됐습니다.
지금 제주도는 소나무 재선충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주도 해변과 중산간을 둘러싸고 있는 검푸른 송림이 단풍든 산처럼 벌겋게 변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자란 소나무 20여만 그루가 재선충으로 고사하고 있어 모두 잘라내야 할 판입니다. 따뜻한 봄이 오기 전에 잘라내지 않으면 재선충은 감염되지 않은 소나무로 옮겨 산림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나무를 서둘러 자르기 위해 비상이 걸렸고 육지에서 군부대가 투입되는 실정입니다.
규모로 볼 때 재선충이 심각한 곳은 영남지역입니다. 경상남도의 경우 약 100만 그루의 소나무가 재선충으로 고사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벌채하고 방재 처리하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지만, 재선충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여름철에 얼마나 더 많은 소나무가 붉게 물들며 죽어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재선충은 크기가 1밀리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실같이 가는 벌레입니다. 솔수염하늘소와 북방수염하늘소는 소나무에 구멍을 뚫어 수액을 빨아 먹으며 사는 곤충입니다.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나 북방하늘소에 기생하며 살다가 이 매개충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으면 그 상처를 타고 소나무의 가지, 줄기. 뿌리로 이동하며 급속히 번식합니다. 나무 조직의 세포 간 물과 영양분 통로를 막기 때문에 재선충에 걸린 소나무는 100% 죽게 됩니다.
재선충은 1988년 부산 금정산에서 처음 감염이 보고됐습니다. 한때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듯했으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 창궐하기 시작했고 작년 피해가 두드러지게 컸습니다. 재선충은 경상도에서 강원, 경기, 충청, 호남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는 인재(人災)냐 천재(天災)를 놓고 책임 공방이 가열되고 있고, 감염 소나무 벌채 예산을 확보하기 힘들어 야단입니다.
왜 과거에는 없었던 재선충이 생겼고, 또 작년에 재선충이 극성을 부렸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재선충과 그 매개충의 서식 환경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은 얼마든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작년 재선충 피해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제주도는 전에 없던 건조고온현상이 여름 내내 발생했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재선충 확산이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기후변화는 서서히 진행되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느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사과 생산지가 북상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악영향은 느닷없이 짧은 기간에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미생물과 병충해가 그렇습니다. 모기 서식 환경이 바뀌면 말라리아가 번창하게 되고, 재선충 서식 환경이 변하면 소나무 숲은 붉게 물들며 고사할 것입니다. 과거 지구상에 번창했던 동식물들이 짧은 기간에 멸종한 것은 기후변화의 간접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가정이 많습니다.
|
|
재선충의 확산이 일정 기간의 서식 환경의 변화에 의한 것이든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든 자연재앙으로서 심각하게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재선충 문제는 지방의 그렇고 그런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조류독감(AI)이 발견되자 그 즉시 매스컴이 세상이 떠나 갈듯 요란스럽게 보도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소나무 숲은 여론 주도층이 사는 서울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날그날 먹는 식품도 아닙니다. 국내의 목재 수급에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재선충 피해가 심각한 재난으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소나무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소나무는 한국의 상징적 수목입니다. 한 그루에 수천 만 원하는 조경 소나무도 지방의 소나무 숲에서 자란 나무들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나무의 환경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소나무 숲이 말라버린다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세계적 산림녹화 성공 국가' 사례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소나무 숲이 많은 지방은 인구도 적고 지자체 예산도 모자랍니다. 또한 재선충은 군이나 시의 경계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재선충으로부터 소나무를 지키는 것은 지역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국가 과제입니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넓어질수록 그 배후의 자연은 더욱 풍부해져야 문명과 자연이 균형을 이룹니다. 행정 관청으로서 별로 힘이 없는 산림청이 이 재난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100년 후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 정부 연구기관의 환경보고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온상승만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온상승에 의한 병충해의 공격을 감안한다면 소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훨씬 빠를지 모릅니다. 재선충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소나무 병충해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
| 필자소개 |
|
김수종 | |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