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환히 비추어 2010년을 반기는 시각,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들의 상 주고 받기가 한창입니다. 영하의 날씨에 온 몸을 드러내다시피한 여자 배우들과 가수들의 모습, 마음이 아픕니다. 그이들이 있는 방송국은 난방이 잘 되어 춥지 않겠지만, 냉방에 웅크리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따뜻한 방송국의 헐벗은 여인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요. 자신의 몸에 자부심을 느껴서 벗은 건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벗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막 47년 경력 배우 반효정씨가 SBS 연기대상 공로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릅니다. 유일하게 바깥 날씨에 어울리는 차림입니다. 은회색 두루마기에 흰 목도리가 기품 있습니다. 선생은 "찬란한 유산"의 장숙자 할머니로 산 몇 달이 행복했다며, 배우로서, 좋아하는 길을 40년 넘게 달려왔는데 돌이켜보니 자괴감만 든다고 술회합니다. 그리곤 백범 김구 선생이 좋아하시던 시라며 시 두 줄을 낭송합니다. "눈 내린 들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남긴 그대의 발자국이 뒤를 따라오는 자에게 이정표가 되리라." 그리곤 다짐합니다. 배우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깨끗한 눈길 함부로 걷지 않겠노라고.
반 선생 덕에 나이의 아름다움과 복장의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지난 일년은 어려지는 해, 벗는 해였습니다. 연예인들을 필두로 동안 열풍에 휘말려 얼굴을 어리게 만들고, 몸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올해는 부디 입는 해, 아름답게 나이드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반 선생과 반 선생의 발언 앞에 잠시 숙연하던 후배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반 선생, 부디 건강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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