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법정스님 가시고 겨우 3년, <무소유>를 사겠다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은 그새 스님을 잊었으나 저는 날이 갈수록 스님이 그립습니다. 아니, 스님 같은 사람이 그리운 것이겠지요.
법정 스님 가시고 삼년, 지난 월요일은 스님의 기일이었습니다. 불교신자도 아닌데 그날을 기억하는 건 벽에 붙어 있는 신문 기사 때문입니다. 그 한 뼘 종이 속 스님은 가사 장삼 차림으로 슬며시 웃으시고, 그 얼굴 위엔 ‘빈손으로 돌아간 법정스님 내일 다비식’이라 쓰여 있습니다.
제겐, 당신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당부보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다짐이 더 놀라웠습니다. 죽은 후에까지 양심을 놓지 않고 참회하시겠다니 살아 있는 철면피들에게 이보다 매운 죽비가 있을까요? 이젠 ‘무소유 소유 경쟁’도 그치고 스님을 잊은 사람도 많지만, 저는 새록새록 스님이 그립습니다.
말주먹을 주고받는 남북한을 보면, 6·25 전쟁은 ‘겨레의 치욕’이라고 하시던 스님이 생각납니다. 후안무치한 권력추종자들이 법을 조롱하는 걸 보니, 국회와 행정부를 국립묘지로 옮기면 흥정·음모·부정·부패가 줄어들지 모른다고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다는 교수들의 세미나에서 정체불명의 우리말을 들으며, 모국어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시 이 땅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신 스님을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는 취임 후 첫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새 대통령의 얼굴이 무서워 스님을 생각했습니다. 1980년 11월에 쓰신 ‘우리들의 얼굴’에서, 사랑으로 싸이지 않은 얼굴은 얼굴이 아니고 ‘영혼이 빠져나가 버린 빈 꺼풀’이라고 하셨지요.
“역사상 독재자들의 얼굴에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웃음이 없다. 무섭도록 굳어 있기만 하다. 그의 내면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이리라. 누가 자기한테 오래오래 해 처먹으라고 욕이라도 하지 않나, 혹은 자기 자리를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미지나 않을까 해서 늘 불안하고 초조할 것이다. 이 다음에는 어리석은 백성들한테 또 어떤 먹이를 던져줄까, 머리를 짜다보면 잠자리인들 편하겠는가. 그래서 잔뜩 굳어져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스님은 <무소유>에 실린 ‘아름다움’이라는 글에서도 얼굴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라고.
봄은 ‘보는’ 계절이지만 티끌 날리는 하늘부터 ‘빈 꺼풀’ 같은 얼굴들까지, 눈 둘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좀더 볼만한 곳으로 만들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요? 스님은 수상집 <산방한담>에 쓰신 ‘시도 좀 읽읍시다’에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시를 외우고 공무원이 시를 메모하고, 근로자의 작업복 주머니와 주부들의 장바구니에 시집이 들어 있으면 이 세상이 훨씬 아름다워질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말씀 따라 시를 읽습니다. 2001년 이승을 떠난 이성선의 <산시>(山詩) 속 ‘나 없는 세상’입니다. “나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저 물속에는/ 산 그림자 여전히 혼자 뜰 것이다.”
대통령, 장관, 장군, 무서운 얼굴, 겁먹은 얼굴, 두꺼운 얼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산 그림자는 여전하겠지요. 스님, 스님 또한 사라지셨지만 당신의 ‘말빚’은 오히려 ‘말빛’ 되어 길을 비춥니다. 지켜지지 않은 유언을 서운하다 마시고 돌아와 주십시오. 높고 맑은 ‘법정’(法頂: 법의 이마) 보여 무너진 법 세우시고 참회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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