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저는 노인이 아닙니다 (2013년 1월 12일)

divicom 2013. 1. 12. 11:27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새해 초입에선 늘 '잘 나이들자'고 마음먹지만, '잘 나이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나이들수록 절감합니다.

 

저는 노인이 아닙니다

 

해 바뀐 지 보름이 되어가지만 아직 작년의 부록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바뀐 나이는 바뀐 연도처럼 서먹해도 저는 노인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젊지 않습니다. 제가 타고 가는 버스에도 창밖 거리에도 노인이 넘쳐납니다. 코언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지금 이 나라는 노인들의 나라입니다. 지난달 선거에서도 쉰 넘은 유권자들의 표가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늙고 추함’을 뜻하는 단어 ‘노추’(老醜)는 있어도 ‘젊고 추함’을 뜻하는 ‘청추’(靑醜)는 없는 걸 보면 늙으며 추해지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지난 선거는 노추를 구경하기 좋은 행사였습니다. 평생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의 안마당에 머물던 정치인들이 노욕을 좇아 반대편 사람이 되는가 하면, 젊은 시절 독재자를 비난하여 이름을 얻은 사람이 그 독재자의 유지를 받드는 세력에 가담하여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지역·문화·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나이처럼, 나이 들어 추해질 가능성 또한 보편적입니다. 프랑스의 부자 과세 정책이 싫다고 러시아로 간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좋은 예입니다. 우리 나이로 65살인 그는 프랑스 정부가 100만유로(약 14억원) 이상 고소득자에게 최고 75%의 소득세를 부과하도록 세법을 개정하겠다고 하자, 13%의 소득세만 내면 되는 러시아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년인사회에 가느라 버스를 탔지만 마음은 새롭지 않습니다. 마침내 목적지, 행사가 시작되려면 20여분이 남았지만 행사장엔 나이 든 사람들이 가득하고, 한쪽에 배치된 의자들은 아예 경로석입니다. 여든 가까워 보이는 어른 한분이 들어섭니다. 빼빼 마른 몸을 어서 의자에 앉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른은 의자는 보는 둥 마는 둥 인파 속에 설 자리를 잡습니다.

 

제 젊은 동행도 그분을 보고 있었나 봅니다. “저분이 누구예요?” 그의 눈이 존경심과 호기심으로 반짝입니다. “한승헌 변호사님”이라고 대답하는 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멋있게 나이 드는 어른을 뵈면 젊지 않은 게 자랑입니다. “늙으면 필연코 추해진다”고 노래했던 이영광 시인이 옆에 있다면 ‘저분을 보시오. 저분을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소?’ 하고 묻고 싶습니다.

 

젊은이는 한 변호사님을 잘 모릅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수많은 양심수를 변호하신 인권변호사, 민주화 과정에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시고 8년 동안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던 분이라고 얘기하니 “그렇게 살아오신 분답네요”라는 응답이 돌아옵니다. 그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다가가 인사라도 드리지 그러냐고 하자 “아직은 제가 저렇게 훌륭한 분께 인사를 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입니다.

 

젊은이에게 얘기하진 못했지만 한 변호사님은 어떤 경우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시는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젊은 만큼 강성 일변도인 그에게 변호사님의 유머 책 한 권 선물해야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기자에게 ‘나는 한가라서 평생 한가합니다’라고 대답하신 그분의 유머가 그분의 청정한 모습처럼 깊은 깨우침을 줄 테니까요.

 

집으로 가는 버스도 올 때 탔던 버스처럼 나이 든 사람 일색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노인이 아닙니다. 한 변호사님을 생각하면 드파르디외나 저는 아직 아이입니다. 떠밀리듯 들어선 새해, 한 변호사님 덕에 결심합니다. 그분처럼, 다만 서 있는 자세만으로 젊은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노인이 되리라. 육신은 ‘노화’해도 ‘노추’는 불가능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부디 오래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