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2012년 12월 15일)

divicom 2012. 12. 15. 20:35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지난달 대만에서 열린 세계여기자작가회의(AMMPE)에 참석해 ‘디지털화가 한국의 언론과 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얘기하고 왔습니다. 얘기의 요지는, 디지털은 콘텐츠(내용)를 담아 나르는 도구일 뿐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디지털의 오·남용과 선정주의에 휘말리지 말고 진실을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진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엊그제 국가정보원 직원의 오피스텔에서 벌어진 불법 선거운동 공방은 디지털의 악용 또는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디지털 특보’라는 이름으로 ‘댓글 알바’를 뽑아 포털사이트에 자기 당 지지 글을 올리거나 야당 비난 댓글을 달게 한 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회의 참석자들을 생각하니 부끄럽습니다. 27개국에서 모인 여성들은 피부색도 언어도 달랐지만, 디지털 시대에 글 쓰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자세만큼은 똑같이 진지했습니다. 적어도 10년 이상 혹은 평생 언론인이나 작가로 살아온 이들의 빛나는 눈에서 진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의 긍지와 보람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려고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없는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대통령 후보 토론을 보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경우도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8년간 대통령의 딸로, ‘내 귀에 캔디’ 같은 말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가 정치인이 되었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현재에 이른 두 후보와 토론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겠지요. 게다가 아버지가 왕과 같은 대통령이었으니 아버지에게서 정치 교육을 받았다면 민주 대통령 교육이 아니라 군주 교육이나 공주 교육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이고 이곳은 북한이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나라의 지도자 자리를 세습했지만, 이곳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생방송 토론을 통해 능력을 검증받지 않고는 누구도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토론에서 박 후보는 “지하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하경제는 ‘양성화’할 수는 있으나 ‘활성화’해선 안 되는 것이니까요. 디지털 행동가들은 박 후보가 지난 8월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도 ‘지하경제 활성화’라는 말을 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똑같은 ‘실수’가 두 번 반복되면 실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박 후보가 자신이 모르는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그 일이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벗어날 땐 그 일을 그만두고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는 것이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됩니다. 내일 3차 토론에서 박 후보가 또 어떤 ‘실수’를 할지, 혹시 대통령 말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3차 토론 후 디지털 행동가들의 활약도 기대됩니다. 그들이 후보를 조롱하는 댓글을 써 나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정권 행사를 독려하는 창의적 콘텐츠를 만들어 퍼뜨려주길 바랍니다. 인디밴드 지미 스트레인이 노래하듯 “역사의 바다를 항해하는 국가라는 배에 승객은 없다. 우리 모두가 선장이다”라는 걸 부각시켜주길 바랍니다. 12월19일이 성공한 선거혁명의 날로 기록되고, 내년 세계여기자작가회의에서 한국 대표가 ‘작년 대통령 선거는 디지털 행동가들 덕에 거둔 민주주의의 승리였다’고 자랑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