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2009년 1월 28일)

divicom 2009. 10. 31. 10:39

 

꼭 일 년 만입니다. 두루마기 차림으로 차례 상에 제주를 올리시는 걸 보니 건너편에 앉아계실 할아버지, 할머니, 누대 조상님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80여 년 낡은 무릎을 힘겹게 굽히고 앉아 가만가만 지난 일 년의 희로애락을 보고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부모님 앞에 성적표를 내놓은 초등학생입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노트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신앙의 대상을 조상과 선산의 묘소에 두고 살아왔다. 내 조상이 위대하고 전지전능하지는 못할망정 당신들의 자손인 나를 사랑할 것이고 나 자신 그 분들로 인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엊그제 시립 은평노인종합복지관에서 230여 명의 홀몸 노인들이 합동 차례를 올렸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차례 상 앞에 섰을 그 분들을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옵니다.

 

-민주주의는 어렵다-

 

아버지가 다시 젊고 늙은 자손들과 굽히기 힘든 무릎을 굽히실 때 과일부터 남의 살까지 각양각색 음식이 차려진 차례 상이 보입니다. 며느리들의 일을 줄여줘야 한다는 어머니와 ‘형식을 줄이다 보면 내용이 사라진다’는 아버지의 주장이 맞서 상의 크기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셨지요. 결국 ‘민주주의는 어렵다’며 중간 크기로 맞추신 상, 볼 때마다 슬며시 웃게 됩니다.

 

마침내 차례가 끝나고 음복(飮福)의 시간, 조상님들이 물리신 상에 앉아 조상님들이 주시는 복을 먹습니다. 순리가 지켜지지 않는 세상, 삼대가 동석하니 나이 먹는 일조차 행복합니다. 당연히, 이 행복을 누리기는커녕 설을 눈앞에 두고 목숨을 잃은 용산 철거민 참사의 여섯 희생자가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절절히 집 없는 설움을 겪으신 아버지도 그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오래전 마포 한 구석 아버지 소유의 작은 건물은 동네에서 세가 제일 낮았습니다. 누군가 세를 올려 받으라 하자 “세를 많이 받으면 그 사람들은 언제 집을 사냐?”고 반문하셨죠. 저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초라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언덕을 오를 때는 “이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늘 이웃을 강조하시어 우리 살림이 어려운 걸 몰랐습니다.

 

용산 참사를 생각하니 성급하고 과격한 진압에 대한 원망과 반성을 모르는 정부에 대한 걱정이 꼬리를 뭅니다. 정치인들이 숨진 철거민들을 위한 합동분향소에 갔다가 유족들의 거부로 발길을 돌렸다지요. “제일 나쁜 정치는 국민과 싸우는 것”이라는데 요즘 우리나라에선 늘 정부와 국민이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어려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정치인은 되지 말라-

 

아버지는 결코 정치인은 되지 말라 하십니다. “정치집단이나 정치인은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나라와 불행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려 하고, 다른 부류는 정치를 이용해 자신의 영달을 이루려 하는데, 희생당하는 쪽은 항상 전자이다. 그러므로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뛰어난 사람은 제도권 교육을 오래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건, 열두 살에 가장이 되어 평생 홀로 자신을 교육해 오신 아버지 때문입니다.

 

명문학교 출신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노인이나, 못 쓰는 칼처럼 이성(理性)을 버려두고 장수(長壽)에 대한 열망과 추억으로 소일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다 같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버지, 당신은 아직 ‘노인’이 아닙니다. 당신의 문제의식과 지적인 호기심이 명절 전 갈아놓은 칼날 같으니 말입니다.

이쯤 쓰고 보니 왜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한 통이 책 한 권 분량이나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담기엔 너무 짧은 지면, 머지않아 다시 한 번 긴 편지를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때까지 안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