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밤은 길지라도 (2008년 11월 26일)

divicom 2009. 10. 31. 10:27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 위기 속에서 종주국 미국도 반성중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붙들고 늘어지고, 일기예보부터 경제전망까지 틀리기를 밥 먹듯 하면서, 주가 폭락, 환율 급등, 건설업체 연쇄부도, 아파트값 급락 등을 정확히 예측한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의 입을 막는 것이 이상합니다. 방송인들과 시청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사투나잇‘을 종영한 한국방송이 미네르바 흠집 내기로 후속 프로를 시작한 것도 이상합니다.

 

-이상한 나라-

 

‘새 주소 사업’한다며 ‘황천길’ ‘부고길’등 잘못 붙인 길 이름을 다시 고치는데 1,000억 원 가까운 세금을 들이고, 퇴직 앞둔 공무원들을 ‘공로연수’로 쉬게 하는데 수백억 원을 쓰면서, 40만 명에 이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교사들과 학자들이 문제없다고 하는 교과서를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고치지 않으면 발행 정지하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공교육 정상화 운운하며 학생부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입시정책도 이상합니다. 군대에서 억울하게 죽은 젊은이를 찾아내려 출범한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접수된 사건의 절반을 남겨두고 올해 말 ‘시한’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수백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 지 1년이 가깝도록 "어떻게 쓰이는 것이 효율적인가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듣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5년 동안 익명으로 8억 원 넘게 기부해온 영화배우 문근영씨가 빨간 칠을 당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문씨가 기부했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련법을 개정하여 정부 통제를 강화하려는 한나라당 의원도 이상하고, 취한 사람이나 할 여성비하 농담을 여성지도자 초청 강연에서 해놓고 뭐가 문제냐고 하는 한나라당 의원도 이상합니다.

 

16세 장애 소녀를 9세 때부터 성추행, 성폭행해온 친할아버지 등 일가족 4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청주지법 형사11부는 이상의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도 부모를 대신해 피해자를 키워왔고 피해자의 정신장애 정도에 비춰 앞으로도 가족인 피고인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니, 이 재판부는 정상이 아닙니다.

 

세계적 ‘피겨요정’ 김연아 선수를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인 ‘그랑프리파이널’ 대회, 그런 국제행사를 겨우 2천6백석 규모의 고양 어울림누리에서 개최하기로 한 대한빙상경기연맹도 이상합니다. 이상한 일은 저 거리를 떠도는 낙엽만큼이나 무수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미네르바가 있고, 그를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 부르는 김태동 교수 같은 경제학자가 있고, 문화방송이 있으니까요. 우리에겐 또 김연아가 있고, 문근영이 있고, 경제가 어려워도 기부하겠다는 네티즌들이 증가하고 있으니까요.

 

-아직 희망이-

 

무엇보다 다행인 건 겨울이 온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힘든데 추우면 큰일이라지만 추워지지 않으면 더 큰일입니다. 경제위기는 회복될 수 있지만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재앙은 절멸로 이어지니까요. 혼자 있으면 추워도 여럿이 함께 있으면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기러기 엄마들, 아이들 다 불러들여, 풍년든 배추로 넉넉히 김장하고, 돈 조금 들여 큰 재미 볼 수 있는 독서삼매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솟구치는 환율 덕에 수입책은 너무 비싸니 우리나라 책이 좋겠지요. 신동엽의 “밤은 길지라도 우리 來日(내일)은 이길 것이다” 같은 시를 읽으면 움츠러드는 몸 어딘가에서 붉은 불이 확 켜지는 것 같습니다. 겨울 끝엔 반드시 봄이 오고 바보들도 죽는다는 진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