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2008년 13월 (2009년 1월 7일)

divicom 2009. 10. 31. 10:36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 사건으로 시작된 2008년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속에 끝났습니다. 자살 폭탄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건 20여명이었지만 가자사태는 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를 낳고도 아직 진행 중입니다. 달력은 오늘을 2009년 1월이라 하지만 세상은 아직 2008년 13월입니다.

 

-말 뿐인 세계의 지도자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일요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에게 “비극적 상황 종료를 위해 즉각 행동하라”고 요청했지만 스스로 전장을 방문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과도한 실력행사를 비난하며 지상군의 가자 진입을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두 달 전 세계인의 박수 속에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가 침묵하는 동안,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은 가자사태의 책임은 하마스의 테러리즘 때문이라며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시선을 나라 안으로 돌리면 가슴이 더 답답해옵니다. 정부는 12월 29일 외교통상부 대변인 명의의 조심스런 성명을 내놓은 후 ‘상황 파악’ 중이고, 서울 서린동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선 소규모의 반이스라엘 시위가 진행 중이지만 국민들 중엔 가자사태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세계 12, 13위를 오르내린다지만 타인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후진국민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테러리즘 운운하는 것을 보니 지난 주 영국 유력지 가디언의 인터넷판에서 본 니르 로센의 글이 떠오릅니다. 로센은 테러리즘은 강한 나라들이 자신들에게 희생당하는 나라들의 투쟁을 일컫는 데 쓰는 규범적 용어라며, 약한 나라들의 투쟁은 결코 테러리즘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1948년부터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축출되었고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었으며 식민지 개척자들이 그들의 땅에 정착하고 있다... 약한 자가 가진 힘은 강한 자의 힘보다 훨씬 적어 피해도 적게 줄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탱크와 비행기가 있었다면 카페를 폭파하고 자가제조 미사일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로센은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싸우는 건 다가오는 선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정 후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거라는 겁니다. 그는 “아랍인의 피에 젖은 손을 갖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수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셋 선거는 2월 10일 실시됩니다. 가자에서 총격이 멎는 건 그 후에나 가능할 거라는 관측이 그래서 나옵니다.

 

500여 명의 사망은 500여 명의 삶이 파괴되었음을, 그들의 꿈과 사랑, 추억과 다짐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건 그냥 숫자일 뿐입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숫자를 가지고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는 동안 가자지구 주민 150만 명과 이스라엘 국민 730만 명은 각자가 섬기는 신을 부르며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하늘이 무서운 새해-

 

그러나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성경, 토라경전, 코란, 불경 등 모든 경전들이 하지 말라는 살인(살생)을 저지르는 게 사람이듯 그걸 막는 것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 이제 그만 정치 지도자들이 계산을 멈추고 가자로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하늘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단죄에 나설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있기 전, 종교가 있기 전, 정치가 있기 전부터 하늘을 우러르던 사람들을 위해, 하늘이 나설지도 모릅니다. ‘세계 천문의 해’라는 2009년, 별을 관측하는 사람들이 하늘의 분노를 보고 기함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늘이 무서운 새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