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글날 태극기 (2012년 10월 9일)

divicom 2012. 10. 9. 11:26

감기에 잡힌 몸이지만 후드티를 입고 베란다로 나갑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국가지정 기념일은 아니지만 저는 이 날이 그 어느 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내거니 가을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국기를 흔들어줍니다.


제가 우리말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게 된 건 오랜 기간 영어로 밥을 먹고 살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언어는 사고(思考)를 규정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이는 건 엉망이 된 언어생활과 관계가 있을 겁니다.


최근 학생들과 토론할 주제를 찾다가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공부했던 영어책을 발견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잘 쓴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제가 그 책으로 공부한 게 1970년대이니 그 전에 쓰인 글들이 실려 있겠지요. 놀라운 것은 그 책의 영어가 지금 사용되는 영어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우리 사회만큼이나 변화가 빨라 1990년 대에 쓴 글만 해도 요즘 보면 고어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영어 교육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들의 말투가 영어식이 되었습니다. 불필요한 부사의 사용이 늘고 수동태로 말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동사는 줄어들고 명사와 명사형을 쓰는 일이 잦아 문장이 생동감이 없고 어렵습니다.   


장음과 단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방송국 아나운서들을 보면 우리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도 얼굴이 예쁘면 뽑히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 기사에도 비문이 흔합니다. 예전엔 기자가 실수를 해도 선배들의 눈과 편집과정을 거치며 제대로 된 문장이 되어 나갔는데 이젠 그런 과정이 생략된 걸까요? 


제게 힘이 있다면, 우리말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나운서들은 방송에 출연하는 대신 교육을 받게 하고, 한글날은 국가적 기념일로 정해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우리나라의 모든 간판은 우리말로 쓰게 하고 꼭 외국어를 쓰고 싶으면 우리말 간판 옆에 좀 작은 글씨로 쓰게 하겠습니다. 대학입시 등 주요한 시험에서는 국어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고, 회사 입사시험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기업들을 독려하겠습니다.  


그러면 국민의 영어 실력이 줄지 않겠느냐고요? 국민의 영어 실력이 줄면 외국 관광객들이 줄어들까봐 걱정이 된다고요?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가 아닙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생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고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자기 나라가 제일 편한 이유는 무엇보다 모국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모국어만 하는 사람은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간판에도 외국어가 많고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도 외국어 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정부 또한 외국어를 남발하기 때문입니다. 모국어를 홀대하는 나라는 남의 나라 식민지와 다를 것 없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규정하니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모두 태극기를 내걸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정부가 국민을 이끌지만 또 때로는 국민이 정부를 이끌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정부 관료들이 한글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창 밖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