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최구식, 그리고 판사들의 저항 (2011년 12월 3일)

divicom 2011. 12. 3. 13:09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날 아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와 박원순 당시 야권 단일후보의 홈페이지를 디도스 공격으로 마비시킨 범인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비서 공모씨라고 합니다. 최 의원은 연루설을 부인하며 자신이 연루됐다면 “의원직을 즉각 사퇴하겠다”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다고 합니다. 최 의원은 지난 7월부터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겨우 27세의 비서 혼자 그렇게 큰일을 꾸몄다고 생각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현 국회의 임기가 몇 달 남지도 않았으니 최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해보았자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최 의원이 공씨의 범죄를 몰랐다고 해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국회의원은 자신이 기용한 보좌관과 비서들에 대해 포괄적 지휘ㆍ감독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직선거법 제265조에 후보자의 친족뿐만 아니라 선거사무장이나 회계책임자가 3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을 때 후보자의 당선을 무효화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앞으로 범죄에 연루된 의원, 특히 이번처럼 질 나쁜 범죄에 연루된 의원에겐 당선 무효보다 훨씬 큰 벌을 내려야 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죄, 세금 들여 치른 선거를 무효화시켜 또 다시 선거를 치르게 하여 혈세를 낭비한 죄 등을 물어야 합니다. 의원직 사퇴는 물론이고 다시는 의원직에 나설 수 없게 해야 하고, 선거를 다시 치르는 데 들어가는 비용까지 부담시켜야 합니다.

 

근래 한나라당과 소속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참 기가 막히고 창피합니다. 한나라당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것은 사법부뿐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사법부의 중견 판사들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2월 초하루 법원 내부게시판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불평등 조약일 가능성이 높다"는 글을 올려 법원 내에 재협상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제안한 인천지법 부장판사 김하늘(43ㆍ사법연수원 22기)씨가 청원문 작성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김 판사는 어제 다시 글을 올려 너무나 많은 판사들이 공감을 표시해주어 “감동적이고 가슴이 벅차며 용기가 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 판사는 이르면 다음 주 초 대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할 것이라 합니다.

 

그는 1일 게시한 글에서 "한미 FTA 내용을 분석한 결과 여러 독소조항이 있고 우리 사법주권을 명백히 침해한다는 점에 동의하게 됐다. 12월 중 공감하는 판사가 100명이 넘으면 법원행정처에 TF 구성을 청원하겠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으며 그날 오후 공감 댓글이 100개가 넘자 글을 계속 게시하면 정치적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법부가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며 올린 글을 삭제했다고 합니다.

 

지난달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고 적었던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45·사법연수원 22기)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법관은 국민의 권익 보호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책무를 맡은 공직자”라며 “투자자-국가소송제(ISD)는 법관에게 사법 권력을 부여한 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도 주권 침해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 판사는 어제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침묵이 가장 정치적이고 불의의 편에 서게 될 때도 있다”며, 사법부의 침묵으로 법원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삼권분립 차원에서 사법자제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자, 그는 “사법자제론은 재판 진행 중에 별도의 사안을 다른 사람이 들고 오면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며 다루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번 사안은 개별판사가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 사법자제론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최 부장판사의 의견을 적극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창원지법 이정렬(42·사법연수원 23기) 부장판사도 어제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한미 FTA로 우리나라 사법주권이 침해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른바 ISD 조항에 따라 대한민국 주권인 사법권을 대한민국 법원이 아닌 외국 중재기관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판, 나라를 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투자자가 협정 위반을 이유로 우리 정부를 상대로 분쟁을 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데, 이때 당연히 우리 법원이 재판권을 가져야 하지만 엉뚱하게 제3의 중재기구에 관할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법관들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 판사는 "정치적 중립은 특정 정파의 편을 들지 말라는 것이고 판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ISD 문제는 법률가인 판사들에게는 본연의 업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 최은배 부장판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촉발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 가이드라인' 제정 논란에 대해 "대법원이나 윤리위원회가 아닌 법관들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 부장판사들의 의견에 대해 법원장들은 우회적으로 우려를 표했다고 합니다. 어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금 우리에게 부과된 절체절명의 과제는 바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라며 "재판에 대한 신뢰는 법관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그 믿음은 공정한 재판에 대한 기대와 존경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법관은 항상 조심하고 진중한 자세로 자신을 도야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 것과 부장판사들의 움직임이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양 대법원장의 말처럼 사법부의 과제는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항상 조심하고 진중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 가지고는 확보할 수 없습니다. 최은배 부장판사의 말처럼 침묵이 곧 불의에 대한 동조가 될 때 침묵하지 말아야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천의 두 부장판사에게서 나온 정의로운 외침은 이미 창원에서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침묵하는 다수의 법관들 사이에 이 메아리가 퍼져 나가 한미FTA의 불평등한 조문들이 고쳐질 때 사법부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국민이 늘어날 것입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장들이 지금은 21세기라는 것을, 갓끈이 풀렸거나 잘못 묶였을 때는 오얏나무 아래서라도 고쳐 매야 하는 시대라는 것을 하루 빨리 깨닫고 부장판사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