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역사 앞에서 (2008년 6월 13일)

divicom 2009. 12. 8. 09:34

오랜만에 극장에 갔습니다. 낙원동 옛 허리우드 자리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 독립·실험영화, 고전과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인 그곳에서 지금 제 2회 대만영화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본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감독의 <동동의 여름방학 (A Summer at Grandpa's)>입니다. 타이베이에 사는 초등학생 동동이 방학동안 시골 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경험하는 일들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구조는 단순하고 카메라워크는 담담하지만 사회의 변화를 통찰하는 시선이 깊고도 따스합니다.

세월이 하 수상하여 영화 구경은 생각도 못했는데 극장을 간 건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의 류(劉)참사관 덕입니다. 지난 연말 출판기념회에서 처음 만난 후 연일 보내주는 이메일 자료 덕에 가본 적도 없는 대만에 대해 관심과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영화제에서 상영될 16편의 영화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개막식에 초대도 해주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 자연히 한국과 대만, 외교와 공무원의 역할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과 대만의 대사급 외교관계는 단절되었지만, 이듬해 12월에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가, 또 다음 달엔 주 한국 타이베이대표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작년 한 해 양국의 인적 교류가 68만 명을 초과했고, 올 초 대만의 총통선거 때는 두 나라의 비슷한 정치 상황이 얘깃거리가 되었습니다. 마잉주(馬英九) 후보는 이 명박 대통령 후보의 747 공약을 벤치마킹한 걸로 알려진 633 공약, 즉, 연 6퍼센트의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실업률 3퍼센트 이하를 내걸고 총통에 당선됐습니다. 그도 이대통령처럼 타이베이 시장을 거쳐 총통에 당선되었고 경제 회복을 내세워 8년 만에 국민당의 집권을 이루어냈습니다.

5월 20일, 마 총통의 취임 이래 타이베이로부터는 좋은 소식만 들려옵니다. 야당에선 마 총통의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나, 다른 나라들이 성장률을 낮추느라 바쁜 요즘 대만에선 올 성장률이 5퍼센트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5월 말의 외환보유액도 4월에 비해 6억 9300만 달러나 증가해 세계 5위 자리를 지켰다고 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5월 말에 대만 국민당 주석과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59년 만에 첫 양안(兩岸)영수회담을 가진 데 이어, 6월 11일엔 양안협상을 주도하는 반관반민단체인 중국 해협회(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 해기회(해협교류기금회) 간부들이 10여 년간 중단되었던 회담을 재개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마 총통은 중국 대륙을 방문할 해기회 대표단을 만나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고, 대륙에 있는 동안 “대만의 존엄”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대만의 존엄”이란 표현을 보니 마 총통이 여전히 이 명박 대통령에게서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거 전에는 선거에서 이기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어떻게 하면 국민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이 대통령의 실패에서 배우고 있는 것이지요. 거대한 본토를 상대로 하는 협상을 앞두고 “역사”와 “존엄”을 강조한 것, 그건 한국의 민심이 이 명박 정부를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마 총통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한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의 별장에 초대 받은 게 아무리 기뻤다 해도, 그렇게 서둘러 미국이 원하는 대로 쇠고기 협상을 끝낼 필요는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협상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국민의 자존심을 해칠 필요는 없었다는 걸 안다는 겁니다. 마 총통의 정확한 인식 뒤엔, 한국의 촛불 시위를 보도하며 “마 총통은 이 대통령의 추락을 교훈삼아 그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조언하는 대만의 언론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수행하는 류 참사관 같은 공무원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국의 공산당과 대만의 국민당이 합작을 논하는 시대에 우리나라 서울 한복판에선 또 해묵은 좌우익 논쟁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려는 국민들을 좌익으로 호도하는 극우파들이 있는가 하면, 국민의 순수한 의도를 이용하려는 극좌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위 시민들은 양 극단주의자들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경계합니다.

한국동란 중 좌우익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은 역사학자 김 성칠 교수는 훗날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의 책이 된 자신의 일기, 1950년 11월 29일 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인사행정만이 두드러지게 보인다’는 말이 있더니, 이즈음 대한민국에선 부느니 감투바람뿐인 감이 있다. 그나마 며칠을 갈 것이라고. 그렇게 들고나고 해도 책임 있는 행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빨리 돌리면 써보고 싶은 사람은 다 한 번씩 써볼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2008년 초여름의 상황은 1950년 겨울을 닮았습니다.

이 대통령 취임 100여 일 만에 내각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임명 전부터 국민들의 불신을 받아 온 장관들과 비서관들이 물러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한편에서는, 방송사 사장과 언론단체장에 기용되는 ‘이 명박의 사람들’을 놓고 이 대통령이 아직도 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써보고 싶은 사람’을 한 번씩 다 써보는 대신, 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용하여 대통령과 함께 임기를 마치게 할 수는 없는 걸까, 같은 소득 수준이나 종교적 믿음보다 ‘역사’와 ‘존엄’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가진 사람들, 류 참사관처럼 성실한 공무원들이 가득한 정부를 기대할 수는 없는 걸까,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촛불 시위에 나온 초등학생들의 여름이 <동동의 여름>처럼 될 수는 없는 걸까, 집으로 가는 걸음이 무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