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저, 임신했어요... (2008년 6월 27일)

divicom 2009. 12. 8. 09:37

10대들은 누구나 부모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는 말을 한마디씩 알고 있지만 “저, 임신했어요” 에 버금가는 말은 드물 겁니다. 게다가 사랑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임신한 게 아니라 임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맺었다면 그야말로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퇴락해 가는 어업도시 글로스터(Gloucester)의 글로스터 고등학교 여학생 17명이 집단으로 임신을 하여 나라 안팎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 학생들은 ‘임신 동맹’을 맺고 임신하기 위해 애쓰면서 학교 진료소에서 누차 임신 진단 테스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임신 동맹’에 놀란 어른들은, 진단 결과 임신이 안 된 걸 알고 실망하는 아이들도 있었다는 조셉 설리번 교장의 말에 한 번 더 놀랍니다. 
총 학생 1,200명인 이 학교에서 현재 임신 중인 학생의 수는 작년에 임신했던 학생 수의 4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건 이 학생들이 모두 16세 이하이며, 이들을 임신시킨 남자 중엔 24세의 노숙자도 있다는 겁니다. 


지난주엔 미국의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동생 제이미 린 (Jamie Lynn Spears)이 첫 딸을 출산해 전 세계 10대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제이미는 언니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유명한 배우이고 가수이지만 이제 겨우 17세입니다. 한참 사귄 남자 친구와 낳은 아기라는 점이 10대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지 모릅니다.

‘임신 동맹’이란 말은 아직 낯설지만 10대 임산부, 리틀 맘, 미혼모 등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단어들입니다. 그 중에도 10대 미혼모를 가리키는 ‘리틀 맘’은 지난 14일, 케이블 텔레비전 CGV에서 첫 방송된 <18세 미혼모의 비밀-리틀맘 스캔들>로 인해 별안간 익숙해진 감이 있습니다. 10대 소녀 세 명과 20대 여성 한 명이 미혼모, 소녀가장, 가출과 독립을 겪는 모습을 그려내는 드라마라고 합니다. 그 드라마가 방영되기 직전엔 KBS 2TV의 <인간극장 - 나는 엄마다> 편에 리틀맘 얘기가 방영되어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본 사람들은 대개 임신, 출산이란 그렇게 서둘러 할 경험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달 초 글로스터 고교를 졸업한 아만다 아일랜드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만다는 1학년 때 아기를 낳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주변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합니다. “걔네들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열광하곤 했어요.” 아만다는 새벽 3시에 칭얼대는 아기의 사랑을 느끼긴 어렵다는 걸 알리려 했다지만 그 소녀들에겐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채널CGV가 <리틀맘 스캔들> 방송을 앞두고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글로스터 고교에서와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5월23일부터 2주간 실시된 조사 참여자 중엔 14~19세 청소년 582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76.2 퍼센트가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용기와 책임감”이 있는 행동이라고 답했으며, 23.6 퍼센트만이 “무모한 행동”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인구 3만 명의 조용한 도시 글로스터는 지금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1991년 10월의 무시무시한 폭풍이후 가장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도시에 10대 소녀들의 집단 임신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입니다. 미국 전역, 아니 전 세계의 부모들은 임신 소녀들이 자기 딸이 아닌 걸 다행스러워하며, 글로스터의 보수적 시민들과 학교 진료소 의료진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부모의 승낙여부에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피임약을 처방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던 의사와 간호사는 시민들의 반대에 맞서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피임약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할까 말까보다 중요한 건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것이고, 그 답은 주변 학생들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누군가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열광” 했다는 아만다의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즉, 그들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열망했다는 것이지요. 어쩜 사양길을 걷는 글로스터시의 음울한 상황이 어른들로 하여금 10대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조차 잊게 했을지 모릅니다.

글로스터는 1991년, 3개의 폭풍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재앙을 겪은 후 영화 <퍼펙트 스톰 (The Perfect Storm)>의 주인공이 되어 세계인들에게 자연현상에 대한 외경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제 다시 어떤 도시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글로스터는 세상의 부모들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라고! 어떤 착한 아이도 제 어머니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진 않는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될 때까지 그들을 사랑해주라고. 부디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글로스터의 값비싼 가르침을 흘려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