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맹위를 떨친다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고열을 동반한 동통에 이어 간헐적으로 터지는 기침 때문에 명치끝에서 배까지 손을 댈 수 없게 아프고, 아파도 입맛을 잃은 적은 없던 사람이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나쁜 일에도 좋은 일 한 가지는 따라온다더니 겨울동안 붙은 뱃살이 조금 빠질 모양입니다. 앉아 있기도 힘들지만 이메일 체크는 해야 합니다.
“21일은 임 철순의 날!” 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눈에 띕니다.
“알립니다. 임 철순 한국일보 주필님의 ‘삼성언론상’ 시상식이 21일 오전 11시 30분 프레스 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립니다. 축하, 거듭 축하! 배 아픈 건 조금 참으시고 우선 격려와 축하 글 띄웁시다.” 그리곤 임 철순 자유칼럼 공동대표의 이메일 주소가 쓰여 있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던 건 기 형도 시인이지만 그가 떠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그 시가 힘을 잃지 않는 건 시어들이 품고 있는 보편성 때문이겠지요. 갑자기 솟구치는 질투 덕에, 머리가 이렇게 멍하니 이번 자유칼럼은 건너뛰어야겠구나 하던 조금 전 생각이 사라지고 바로 원고를 쓰기 시작합니다.
배가 아픈 건 무엇보다 이 상에 따라오는 부상(副賞) 때문입니다. 돈 버는 재주는 없어도 쓰고 싶은 곳은 많다보니 현금 부상이 부러웠던 거지요. 이메일엔 부상 얘기가 없지만 지난 2월 임 대표의 삼성언론상 수상 소식이 처음 보도되었을 땐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부상 액수가 쓰여 있었습니다. 얼마였더라,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통합 검색”에 삼성언론상이라고 쳐 넣으니 그 단어가 등장하는 온갖 카페와 블로그, 사이트 등이 나타납니다.
맨 위에 있는 글을 클릭하니 다짜고짜 “삼성언론재단에서 시상하는 삼성언론상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삼성언론상 탔다고 각 언론마다 자랑하는 것이~ 참 한심해보입니다...!” 라고 나옵니다. 그 글 아래엔 두 개의 논평이 붙어 있는데, 아이디 “몽마르냐”가 쓴 첫 번째 평은 이렇습니다. “님이야 말로 '삼성'자 붙었다고 너무 과민반응하시는 건 아닌지.. 삼성언론재단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언론유관기관입니다. 06.03.25 15:14”
그 밑엔 “술 벌레”라는 아이디 옆에 “삼성뿐 아니라 기업에서 기자 교육시켜준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긴 하죠. 우리나라에서 손꼽히긴 합니다만 '비상식적'인 건 사실이죠. 06.03.26 13:02” 라는 글이 보입니다. 그제야 여기가 뭐하는 곳일까 살펴보니, 2003년 1월에 개설된 “언론인을 꿈꾸는 카페-아랑”으로 회원이 자그마치 72,352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2006년 3월에 쓴 글이니 임 대표의 수상을 겨냥한 글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마음이 놓입니다. 몇 개 더 읽어보아도 부상이 얼마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임 대표에 대한 글을 계속 찾아봅니다. 2006년 2월에 고려대 언론인교우회로부터 제12회 ‘장한 고대 언론인상’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교우회는 당시 이 명박 서울시장을 초청해 “이 명박 4년-서울은 변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토론회도 열었다고 합니다. 문득 이 대통령 취임 사흘 전 임 대표가 한국일보의 ‘임 철순 칼럼’에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 내일모레가 취임식인데 벌써 '이명박 피로증'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왜 피로를 느낄까. 어떤 정부든 누구든 정부와 공직자들에 대한 한국인의 피로증은 이미 고질이 돼 있는 것일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그에게 실패한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실패해본 적이 없는데, 정작 대통령이 되어 실패한다면 개인에게는 물론 나라에 큰 불행이다. 이제 그의 실패는 대한민국의 실패다.”
이 글을 읽으니 이달 초, 같은 칼럼에 ‘화장을 지우고’라는 제목으로 썼던 노 무현 전 대통령 얘기도 다시 읽게 됩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은 화장을 지우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멘토이며 롤 모델이다... 소급과 월반이 없다는 것, 그것이 삶의 오묘함이며 어려움일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남은 생애에서 아름다운 성취를 거두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계속되는 인터넷 서핑으로 두통이 가열되어 그만두려 할 때에야 삼성언론상의 부상이 2천만 원이라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2천만 원! 이 명박 정부의 부자 장관들이나 연봉 133억 원이라는 삼성전자 사내이사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액수입니다. 물론 미국의 저명한 퓰리처상도 부상은 1만 불에 불과하지만, 그 상은 언론인이 낸 기금으로 운용되는 상이니만큼 기업이 주는 상과 단순비교를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질투 덕에 쓰기 시작한 원고를 송구한 마음으로 끝맺게 되었습니다.
임 선배, 부디 존경 받는 언론인으로 남아주십시오. 정계로 정부로 길 바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청청한 목소리 들려주시어 “언론인을 꿈꾸는 카페” 7만여 회원들의 멘토가 되어주세요. “장한 고대 언론인상”의 기억도 “삼성언론인상”의 기억도 받는 즉시 지우시고, “소급과 월반” 없는 삶에서 “아름다운 성취” 오래 많이 거두세요. 네? 선배가 상 받는 거 배 아파서 이런 글을 쓰느냐고요? 아니, 그건 아닐 거예요, 고열 감기 탓이라면 혹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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