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신앙과 세계화 (2008년 4월 18일)

divicom 2009. 11. 29. 10:40

1997년부터 10년간 영국의 총리를 지낸 토니 블레어가 이달 초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신앙과 세계화”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블레어는 원래 성공회 (영국 국교회라고도 함) 신자였으나 작년 크리스마스 직전 가톨릭이 되었고 이번 연설은 가톨릭 신자로서 처음 행한 연설이라고 합니다.

 

블레어는 올 여름 런던에 ‘토니 블레어 신앙 재단’을 세우고 그 재단을 통해 종교간 대화를 촉진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 무슬림, 유태인, 불교도, 시크교도 등, 다른 종교의 신도들이 합심하여 각국 정부로 하여금 ‘새천년 발전 목표 (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이루게 하고,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는 세계 극빈자들의 수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연설을 잘하기로 소문난 블레어는 작년에 중국에서 한 연설로 24만 파운드, 올해 초 미국 플로리다의 골드만 삭스 회사에서의 연설로 30만 파운드를 벌었지만, 웨스트민스터에서 한 연설에 대해서는 금전적 대가를 전혀 받지 않아 신앙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블레어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민다나오 섬에서 활동 중인 자선 단체 제이티에스 (Join Together Society)가 떠오릅니다. 열흘 전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기 전까진 민다나오가 분쟁지역인줄도, 제이티에스라는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때 원주민들의 낙원이었던 민다나오는 14세기엔 무슬림들이,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절과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미국 식민지 시대엔 기독교인들이 정착하면서 분쟁에 시달려 왔다고 합니다. 게다가 필리핀 전역에서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공산주의자 반군들로 인한 상처와 피해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한국의 제이티에스가 들어간 것은 2002년, 이사장인 법륜스님이 북한동포돕기와 남북화해협력에 대한 공로로 막사이사이상 국제평화와 이해 부분에 선정되면서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만난 민다나오의 토니 대주교로부터 “남북의 갈등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처럼, 종교와 민족문제로 갈등하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듣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아(飢餓), 질병, 문맹이 없는 세상을 목표로 하는 제이티에스는 여러 차례의 지역 답사 후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 지원 사업을 진행하여 지금까지 29개 마을에 64칸의 교실을 지었답니다. 그동안 민다나오를 찾아온 다른 단체들이 주로 포교에 열심이었던 반면 제이티에스는 종교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이티에스의 웹사이트(www.jts.or.kr)에도 불교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사장이 스님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단체와 불교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웹사이트의 맨 아래쪽 귀퉁이에 있는 “패밀리 사이트”라는 곳에 들어가야만 ‘정토회’와 ‘에코붓다’ 같은 불교식 명칭을 볼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은 1991년 인도의 불교성지를 순례하던 중, 캘커타 거리에서 아이의 우유 값을 구걸하는 젊은 여인과 둥게스와리 마을 20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길에 늘어서서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돕기 위해 제이티에스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울에 제이티에스 인터내셔널 본부가 있고, 미국, 인도, 필리핀, 아프가니스탄에도 제이티에스가 조직되어 있으며, 미국 제이티에스는 북한 라진-선봉 지역의 지원을 위해 라선 상주대표 사무소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법륜 스님의 구호 활동은 처음부터 종교간 협력의 기반 위에 출발했습니다. 스님에게 막사이사이상을 가져다준 북한동포돕기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100만인 서명운동 덕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정파적인 이해나 이념적 견해에 우선한다는 믿음으로 사회 전반의 고통 해결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왔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경하며 행복하게 공존할 때 세계 국가들의 평화 공존도 가능하다고 결론짓고, 종교는 세계화의 비인간적 영향을 인간적으로 바꾸어 인류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종교는 “선(善)을 위한 적극적인 힘”이라는 걸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것이 블레어 재단의 궁극적 목표라고 합니다. 그는 올 하반기 예일 대학교에서 “신앙과 세계화”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여러 차례 열고 국제 관계 증진을 위한 종교의 역할을 모색합니다.

블레어가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연설하는 동안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악기, 휘파람, 냄비, 자명종 등을 동원하여 온갖 소음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2003년 영국을 이라크 전쟁으로 이끈 장본인이 무슨 종교간 대화 운운 하느냐는 것이지요. 이라크에 억류되었다 풀려난 기독교 평화운동가 노만 켐버는 블레어가 너무도 비기독교적으로 처신했다고 비난하며, 성당에서 연설을 할 게 아니라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비꼬았습니다.

지나간 일은 신도 바꿀 수 없으니, 어쩌면 블레어가 종교간 대화를 부르짖는 건 이라크전쟁에 참여한 걸 후회하는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부디 블레어의 새로운 노력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과 세계화”를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1953년 동갑내기 법륜 스님의 행적에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