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명문 사학 고려대 (2008년 4월 4일)

divicom 2009. 11. 29. 10:37

지난 주 서울 중앙지법 민사합의 51부는 세종대학교가 고려대학교를 상대로 낸 표장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고려대가 조치원 서창캠퍼스의 이름을 ‘세종캠퍼스’로 바꾸자 세종대가 ‘세종’은 세종대의 고유브랜드라며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법원이 고려대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현재 특허청에 등록된 상표 중 ‘세종’이 들어간 것만도 700여건으로 ‘세종’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표장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판결의 요지입니다. 법원은 또한 “캠퍼스라는 단어는 국내에서 대학 교정 또는 지방 분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돼, 세종캠퍼스가 세종대와 동일하다거나 유사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학교 모두 저와는 무관하지만 뭔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미 한 대학교의 이름이 되어 있는 고유명사를 다른 대학교가 지방 분교의 이름으로 쓴다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원 판결이 그런데 무슨 말이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법은 최소한 아닙니까?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로 창설되어 1946년부터 고려대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고대가 근래와 같이 큰 힘을 갖게 된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명박과 함께 인고의 시간”을 기다리다 “승리의 새벽”을 맞은 고대 교우회는 지난 1월 강남의 큰 호텔에서 61학번 대통령 당선자가 참석한 가운데 100주년 기념 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선자는 20일 후 강북의 호텔에서 열린 ‘고려대 경영대 글로벌 50 출정식’에도 참석, “고대 경영대의 발전을 돕겠다”고 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교우회“라는 명칭 때문인지 고대 교우회는 열렬한 신도들의 모임 같습니다. 고대 특유의 강한 결속력과 의리는 고대 재학생이나 졸업생은 물론 고대에 재직하는 타교 출신도 고대인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합니다. 고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그 뭉치는 힘 때문에 고대를 좋아하고, 고대를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그 문화를 싫어합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동문들이 언제부터, 왜 뭉치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뭉침”은 약한 자들이 택하는 생존 방식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있지만 야생의 세계에서도 약한 동물들은 떼 지어 살고 강한 동물들은 독립적으로 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고대엔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다보니 학교와 교우들에게 깊은 사랑을 쏟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반관애민 (反官愛民)과 억강부약 (抑强扶弱)”에 기초를 둔 “민족 고대”의 전통, 어느 대학보다 반독재투쟁에 열심이던 전통이 고대생들로 하여금 효과적 저항을 위해 똘똘 뭉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게 변했다는 겁니다. 이제 고대는 어느 모로 보나 약한 학교가 아닙니다. 대통령을 배출한데다 그 대통령은 드러내놓고 고대 출신을 기용하여 비난까지 받고 있습니다. 학교가 내거는 기치 또한 바뀌었습니다. 이기수 총장도 지난 달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통적으로 '고대' 하면 '촌사람' 이미지가 있었다. 이를 바꿔보기 위해 역대 총장들이 '사색하는 고대' '큰사람 만들기' '막걸리에서 와인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런지 요즘 고대생들에게선 막걸리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고대생 중 지방 출신 학생의 비율도 낮아졌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고대 경영대 같은 곳은 재벌2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학이라고 합니다. 학교밖엔 고대생들이 합심하여 타도해야 할 독재정권이 없어진 대신 권력의 핵심에 있는 고대 출신들이 경계의 눈초리를 받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뭉쳐도 보기 좋은 건 아니지만 살기 위한 자구책이려니 하고 눈감아 줍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힘 있는 조직 중 하나가 된 고대가 자꾸 뭉쳐 힘을 과시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지난 달 중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고대 교우회와 교우회지 편집장을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치적을 홍보하고 반대 세력을 비난하는 기사와 기고문을 실은 교우회보를 발행, 배포한 혐의입니다. 다시는 이런 식의 부끄러운 애정 과잉이 없었으면 합니다.

최근 신문에서 이기수 총장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전면 광고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느 대학도 학교 광고에 총장의 얼굴을 그렇게 크게 실은 적이 없습니다. 고대법과를 졸업한 이 총장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가 모두 고대 동문이고, 타교 출신인 부인도 고대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거친 고대 가족이라고 합니다. 이 총장의 얼굴이 고대 가족 사랑의 최고 상징으로서 광고를 장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에선 3월의 마지막 주말 고대 응원단이 벌인 신입생 훈련이 화제입니다. 군대의 유격 훈련을 방불케 하는 이틀간의 훈련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원자를 대상으로 한 훈련이니 문제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위를 이용한 폭력”이니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노컷뉴스 (nocutnews.co.kr)의 훈련 사진 아래 붙어 있는 코멘트들 중에 자신을 “고대 졸업생”이라고 밝힌 필자의 글이 눈을 끕니다. “사회 나와서 보니, 고대인의 생각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상식이라는 것이 항상 일치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고대인의 시각 이전에, 우리가 항상 견지해야 될 시각이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지금 고대는 “Global Pride”를 주창하며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지만,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례는 고대가 가야 할 길이 꽤 멀다는 걸 보여줍니다. 2000년대 초, 저는 미국대사관의 전문위원으로서 미국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서울의 대학들과 연결시키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접했던 고려대의 분위기 또한 놀랄 만큼 “국내적”이었습니다. 이제 고대는 국제화라는 옳은 목표를 정했으니, 작은 나라 안에서 큰 힘을 행사하며 자부심을 느끼지 말고 세계적 인정을 받는 학교로 커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종대 학생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고려대가 귀교의 교명을 자기네 지방 캠퍼스의 이름으로 한 걸 보면 귀교를 만만하게 본다는 뜻이겠지요? 약한 자의 너그러움은 비굴이니 이번 일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지 마시고 절치부심, 절차탁마하십시오. “고려대 세종캠퍼스” 못지않은 “세종대 고려캠퍼스”를 열게 되는 날까지, 각자 전공분야에서 최선을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