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2008년 2월 11일)

divicom 2009. 11. 19. 12:14

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적조했던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나가서 기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 반갑지 않은 건 질문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른 넘은 독신자들은 왜 아직도 혼자인지를 친척 수만큼 여러 번 얘기해야 하고, 결혼 했으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도 왜 아이가 없는지 변명 같은 설명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일수록 사업에 실패했거나 다른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에겐 “별 일 없지?” 하고 간단히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질문은 묻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정형화된 질문은 묻는 사람이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 갇힌 사람이며 응답자에 대해 별로 애정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해 바뀌고 두 달째로 접어들었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깊고 추운 밤, 멀리 내부순환도로가 스케이트 날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새벽 1시가 넘었는데, 웬 차가 저리 많다지? 갸웃한 후에야 저 차 하나 하나마다 사람이 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애인과 싸우고 어둠 속으로 나선 사람도 있고, 어머니의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이도 있을 겁니다.

시선을 가까이로 옮기니, 비탈진 골목에 선 다세대 주택의 작은 창문으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옵니다. 성적 걱정, 학원비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고등학생이 있을 수도 있고, 신용불량자 신세를 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른 살짜리 몸이 식어가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만치 떨어져 보면, 세상엔 아무 일도 없고 사람들은 모두 잘 자거나 잘 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젠가 교육방송에서 본 이탈리아 영화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Stanno Tutti Bene)’가 떠오릅니다. 가족애로 유명한 시칠리아에 사는 홀아비 은퇴 철도원 마테오, 그가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아이들을 찾아 본 후 죽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영화의 제목입니다.

오페라광인 마테오는 오페라 주인공들의 이름을 따서 아들딸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맨 처음 찾아간 나폴리엔 아들 알바로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의 주인공)가 살지만 만나진 못하고 응답기에 음성을 남깁니다. 마테오는 아들이 대단한 인물인 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국회의원들에게 자료를 수집해주는 사람입니다.

피렌체에 사는 딸 토스카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주인공)는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으리라 생각했지만, 딸은 속옷 광고 사진 모델을 하면서 아비 없는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아픈 마음을 안고 밀라노로 가서 교향악단의 베이스 드럼 연주자인 아들 굴리엘모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의 주인공)를 만납니다. 유명한 음악가가 된 줄 알았던 아들은 직업에 만족조차 못하는 우울한 중년입니다.

마지막 들른 토리노, 그곳에선 딸 노르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의 주인공)가 전화국 중역으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일개 전보담당 직원이며, 결혼 생활 또한 파탄 직전입니다. 노독과 슬픔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난 마테오, 시칠리아로 돌아가 아내의 무덤 앞에 서서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라고 하얀 거짓말을 합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보면 무난해 보이는 삶도 속살은 상처투성이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때론 무관심 때문에, 때론 이기심 때문에 빈 말을 건네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 이제 질문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대답을 강요하는 “별 일 없지?” 대신 “편치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어?”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꾸 그러다 보면 오랜만의 만남이 진실로 반가운 만남이 되고 명절 또한 말 그대로 축일이 되어,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