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박원순의 유서1 (2011년 9월 20일)

divicom 2011. 9. 21. 23:49

요즘 언론에 박원순 변호사의 얼굴이 자주 보입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박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릅니다. 2000년대 초 제가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박 변호사 말고도 유명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그때 많이 만났습니다. 큰 이름에 비해 실속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아주 사기꾼도 있었지만, 박 변호사는 알려진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탈하고 진실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근무하던 미국 외교관들은 우리나라 시민단체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박 변호사만은 좋아할 뿐만 아니라 존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떳떳하고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합리적 대안을 낸다는 점에서 많은 시민운동가들과 달랐습니다. 박 변호사가 미국 정부 초청으로 미국 각지를 방문하고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한 배경에는 그런 외교관들의 존경심이 있었습니다. 그를 '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그가 '좌파'라면 그가 주최하는 행사에 미국대사 부인이 명예위원장을 해주었겠습니까? 어쩌다 그가 대사관에 다녀가고 나면 그와 제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박 변호사와 저는 가는 길이 달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드물게 만나도 여전히 변치 않는 꿈을 꾸고 있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의 꿈은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문득 인터넷에서 그의 유서를 보았습니다. 그가 2002년에 출간한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에 수록한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자녀에게 쓴 유서를 옮겨 봅니다. 

 

 

내 딸과 아들에게

 

유언장이라는 걸 받아 들면서 아빠가 벌이는 또 하나의 느닷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남길 재산 하나 없이 무슨 유언인가 하고 내 자신이 자괴감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유산은커녕 생전에도 너희의 양육과 교육에서 남들만큼 못한 점에 오히려 용서를 구한다.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구나.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

 

가난했지만 내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으로 보면 특히 그렇단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바치신 분들이다.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해 주신 그분들은 내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재대로 시간을 내지도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다.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부모님의 선한 심성과 행동들이 아빠의 삶의 기반이 되었듯 내가 인생에서 이룬 작은 성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른 생각들이 너희의 삶에서도 작은 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아빠의 변명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홀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단지 책 보따리 하나 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컸다. 학창시절에는 감옥도 가고 학교로부터 제적이 되어 긴 방랑의 세월도 가졌다. 긴 고통과 고난의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것에 굴하기는커녕 언제나 당당히 맞서 극복해 왔다. 그런 힘든 나날이 오히려 더 큰 용기와 경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진리임에는 틀림없는 듯 싶구나.

 

당연히 너희의 결혼을 치러 주는 것이 내 소망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집 한 채 마련해주지 못하고 세간조차 제대로 사주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 아빠에게도 왜 없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능력이 안되는 나를 이해해다오. 우리가 약속했듯 대학까지만 졸업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너희가 다 알아서 해결하고 개척해 가렴.

 

그러나 너희가 아무런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거창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다 해도 전혀 기죽지 말아라. 첫출발은 언제나 초라하더라도 나중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 같은 것이다. 언제나 꾸준히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인생을 잘사는 것이란다. 더구나 인생은 그렇게 돈이나 지위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희는 돈과 지위 이상의 커다란 이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아무런 유산을 남가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큰 유산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