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중국의 문제, 세계의 문제 (2011년 8월 19일)

divicom 2011. 8. 19. 08:11

오늘 아침 자유칼럼에서 보내준 '김홍묵 촌철'은 13억 인구 대국 중국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보여줍니다. 읽고 보니 그 문제들은 바로 지금 세계가 직면하고 있거나 곧 직면하게될 문제들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 문제들 중에도 언론 탄압이 심각하게 느껴지는 건 제가 겪어본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특히 '옛 서적 재발행시 현 상황에 타당한지 검토'한다는 항목이 한숨을 자아냅니다. 우리 정부가 중국 정부로부터 이런 이상한 방침을 배우지 않길 바랍니다. 글이 제법 길어 조금 줄여 인용합니다.

 

 

불안한 중국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밀집해 있는 중국. 그 인구 대국이 2004년 사상 처음으로 농산물 수입국이 되었습니다. 상반기 농산물 수입이 전년 동기비 62.5% 증가한 1백43억5,000만 달러인 반면, 수출은 11% 늘어난 1백6억2,0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1998년 이후 해마다 곡물 수확량이 줄어들면서 전략비축물량이 줄어든 때문입니다. 먹거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입니다.

 

13억 중국인의 한 해 식량 수요는 4억8,500만t 수준. 98년 곡물 생산량 5억1,200만t을 기록한 이래 계속 떨어져 2003년에는 4억4,200만t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무원은 2004년 3월 각 지방정부에 식량증산을 위한 긴급 통지문을 보냈습니다. △휴경지의 생산 재개 △이농 농민의 귀농 독려 △현(縣)정부의 식량증산 책임감독제 실시 등의 내용입니다.

 

식량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홍수와 가뭄 그리고 사막화로 농지가 유실되고 황폐화하면서 경지면적이 매년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급격한 산업화로 농업용수가 달리고 농경지가 잠식되거나, 경작지를 산림으로 환원하는 퇴경환림(退耕還林)정책도 농지 부족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농촌이 피폐해지면서 3억 명 이상의 농민이 도시로, 공장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물가와 임금도 마구 뛰고 있습니다.

 

물부족과 오염도 심각합니다. 세계 인구의 20%가 사는 중국의 수자원은 7%에 불과합니다. 국내 인구의 3분의 1이 밀집해 있는 화베이(華北)지방은 수자원이 6%로 물부족이 더 심합니다. 이 때문에 보하이(渤海)만으로 흘러드는 하이허(海河)ㆍ랴오허(遼河)ㆍ황허(黃河)는 각각 56.7%, 37.9%, 29.5%가 5급수입니다. ‘썩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해상 유전의 원유 유출, 핵잠함의 방사성 물질 누출까지 겹쳐 해산물 생산과 수급도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인구의 고령화도 간과할 수 없는 불안 요인입니다. 55개 소수민족은 예외지만, 인구의 92%를 점하고 있는 한족(漢族)에 대해서는 철저한 ‘1가정 1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 억제 효과는 컸지만 젊은 층의 부양 부담은 커지고 있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면 강제로 낙태시키는 바람에 몰래 낳아 기르는 아이도 몇 백만 명인지 알 수 없습니다. 호적도 없이 각종 사회적 혜택에서 밀려난 헤이하이즈(黑孩字)들입니다. 요즘엔 어쩔 수 없이 허용하는 쌍둥이 출산을 위해 다태아(多胎兒) 임신 촉진 약이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소수민족의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통되게 입을 모으는 주장은 독립입니다.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은 8% 정도지만 주거 면적은 63%에 이릅니다. 중국 정부는 1984년 ‘민족구역자치법’을 제정해 ‘소수민족에 의한 소수민족의 통치’를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고 중화민족에 동화시키자는 게 목적입니다. 특히 신장(新疆)위구르, 시짱(西藏:티베트), 네이멍구(內蒙古) 등 서북 3개 자치구에는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융합정책을 펴 왔습니다.

 

중국 정부가 건국 직후부터 강압적으로 점령한 이들 지역은 지하자원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이들 자치구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득은 대부분 한족의 차지입니다. 중앙 정부의 상무위원은 물론 자치지역 행정기관의 핵심 요직도 한족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차별대우에 대한 박탈감, 소외감이 최근 유혈폭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들어서 지난 5월 발생한 네이멍구의 몽골족 시위도 규모는 작지만 “한족 물러가라” “몽골을 해방시키자”는 반정부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발단은 석탄을 운송하는 대형 트럭이 도로가 아닌 초원을 달리다 한 유목민이 가로막자 그대로 치어 숨지게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천 명의 시민과 중고교생, 대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네이멍구의 석탄 생산량은 2002년 1억t에서 지난해에는 7억9,000만t으로 늘어났습니다.

 

중국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습니다. 석탄만 캐 가고 유목민의 젖줄인 초원 환경을 망친다며 벌인 몽골족의 첫 시위에 휴교령을 내리고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몽골족 대학생의 외출을 금지시키고 인터넷의 글과 동영상도 삭제했습니다. 대규모 무장병력과 장갑차까지 동원했습니다. 당근책도 내놓았습니다. 네이멍구와 신장위구르 지역 등에 매년 130억 위안(약 2163억 원)의 유목민 방목금지보조금, 초원목축균형장려금, 생산보조금 등을 지원키로 했습니다. 유목민을 숨지게 한 한족 트럭 기사에게는 사건 발생 한 달 만에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7월에는 신장위구르 허톈(和田)시에서 12일 사이 두 차례의 파출소 습격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카슈가르에서는 트럭을 습격, 기사와 행인을 살해하는 테러도 있었습니다. 베이징올림픽 직전인 2009년 7월 우르무치에서는 유혈폭동으로 197명이 숨지고 1700여 명이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중국의 혼란을 틈타 위구르족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웠던 이곳은 중국 전체 석유의 30%, 천연가스의 34%, 석탄의 40%가 매장돼 있는 곳입니다.

 

당국의 강력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지식인과 언론의 반발이 끊임없이 불거집니다. 건축가ㆍ 설치미술가이자 인권운동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 53)의 체포, 석방에 대한 세계 각국의 반응과 비판은 류샤오보 구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습니다.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을 공동 설계하기도 한 그는 중앙집권체제와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주 해왔습니다. 경제범죄혐의(탈세)로 그를 체포한 중국 당국은 석방 후에도 재갈을 물려 아무 말도 못하게 했습니다.

 

반체제 작가로 17차례나 출국하려다 실패했던 랴오이우(廖亦武, 52)는 지난 6월 쓰촨(四川)성을 탈출, 독일에 망명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중국의 정치부패ㆍ소외계층ㆍ기아문제와 공산주의의 광기를 파헤쳤습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때는 시위희생자들을 공개 애도하고, ‘대학살’로 규정했다가 ‘반혁명분자’로 구금돼 4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와 연계해 중국 국무원 중앙선전부는 최근 언론통제 8대 지침을 하달했습니다. △자유 사상가에 의견 발표 기회 제공 금지 △파룬궁(法輪功) 창시자 리홍즈(李洪志)의 생일 광고에 생일축하 문구 삽입 금지 △옛 서적 재발행시 현 상황에 타당한지 검토 △(정부) 내부문서 공개 금지 △범인 체포 보도는 늘리고 살인사건 보도는 줄이며 구체적인 사건 내용 보도 금지 등입니다.

 

이같은 지침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과 언론인들은 보도를 강행하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3일 고속철 추돌 참사 이후 징치관차(經濟觀察)는 8월1일자에서 9개 면 전면 특집으로 중국 철도부의 문제점을 보도했습니다. 또 사설을 통해 런민(人民)일보와 자매지 환추(環球)시보에 대해 “사고를 호도하지 말고 언론의 양심을 가지라”고 일갈했습니다.

 

한 언론인은 중국판 트위터에 “밤 10시 텅 빈 면들을 채우라는 지시를 받았고, 밤 12시 더는 견딜 수 없어 울었다”고 울분을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기자는 “독재자들은 언론을 누르면 대중의 분노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틀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식량문제, 민족갈등, 언론의 자유를 철권으로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중국 당국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들의 입을 막고 강력한 정권을 유지할 수 없음은 역사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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