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유재석씨에게 (2008 년 10월 15일)

divicom 2009. 10. 31. 10:21

최진실씨가 몸을 버린 지 2주가 되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49재전이라 영혼이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일까요? ‘국민요정’ 생각을 하니 ‘국민엠씨’ 유재석씨가 떠오릅니다. 1990년대 연예계를 대표한 배우 최진실씨와 2000년대 후반 텔레비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연예인 유재석씨가 나눠 가진 ‘국민’이라는 접두어 때문이겠지요. 지난 주 한국방송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유재석씨는 현재 예능 프로그램 회당 최고의 몸값인 900만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면식도 없는 유재석씨에게 글을 쓰게 된 건 몸값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 몸값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위로하고 싶어서입니다. 최진실씨는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화면을 통해 알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유재석씨가 느끼는 슬픔은 비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긴 무명시절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방송국 프로듀서에게 추천해준 은인을 잃은 상실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보지 못한 ‘별’의 자리에 오른 동료로서의 동질감.

 

-슬픔이라는 거울-

 

‘국민요정’을 잊지 못하는 대중은 핏발선 눈으로 그녀가 떠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가장 하기 쉬운 건 희생양을 찾는 일. 최진실씨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살인마’ 백모씨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평생 저주’를 다짐하는 댓글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온갖 역경에서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최진실씨에게 그런 식의 추모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외침과 손가락질을 멈추고 그녀의 죽음을 거울삼아 각자의 지금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그녀를 기리는 옳은 방법일 겁니다.

 

타고난 외모와 재능이 있어야 들어설 수 있었던 연예계가 성형외과의 도움과 훈련으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영토가 되면서, 먼 곳의 사랑이었던 ‘별’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생후 2, 3년 된 아기들이 연예인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어 박수를 받고, 자녀를 ‘별’로 만들려는 엄마들 덕에 연기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라는 유례없는 연예공화국이 되었지만, 카리스마와 신비를 먹고 살던 연예인들은 만인의 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연예인들의 인간적이다 못해 어리석은 면을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면서 유재석씨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장 선호하는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라는 명예의 뒷면엔 늘 책임이라는 빚이 따라옵니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이 국민을 편안케 하며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라면, 연예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은 국민이 즐거운 오늘을 통해 보람찬 내일을 준비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연예공화국 대통령-

 

유재석씨! 부디 최진실씨가 남긴 슬픔의 거울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100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대중에게 웃음을 주며 자신의 이름 속 ‘희망’을 나눈 봅 호프처럼 살 것인지, 9살에 강간, 14세에 출산 등 숱한 고난을 딛고 텔레비전 역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오프라 윈프리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신혼의 아내와 더불어 한국판 ‘브란젤리나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결합을 이르는 말)’를 이룰 것인지...

 

이들은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나 대중의 노리개가 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불운한 타인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유재석씨는 이미 소리 없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니,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 자신과 동료 연예인들을 노리개로 만드는 천박한 말의 난장을 벗어나 방송 문화의 격조를 회복하고, 대중과의 진정한 ‘해피투게더’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변덕스런 대중이 회당 900만원이라는 몸값에 문득 분노하며 질투와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 전에 말입니다.